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2장 8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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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그러나 너희 말은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보다 더하는 것은 악한 자에게서 온다.마태복음
8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약속이나, 맹세대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너희 말은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내가 옳아! 내가 맹세코 말하는데! 000하면, 내가 장을 지진다, 이름 석자를 갈아버린다!'는 식으로, 어떤 것을 주장하거나, 어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좀 센 말을 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맹세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표현 쓰는 것 자체가, 자기 주장을 확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 옳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렇다 그렇다'고 표현했는데, 'YES'에 해당됩니다.
'그렇다' 이것은 각각 자기는 다 맞습니다. 누구든지, 종교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교대로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유대교도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기독교도 역시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누구든지 사람은 다 자기 것이 옳은 것입니다.
정치가들도 자기 확신이 있지요.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우리는 정권을 잡아야 돼!' 정치가들도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확신이 지나쳐서 만약에 확신 때문에, 남을 공격하거나 살상을 가한다면,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슬람은 자기가 옳다 해서 살상을 밥 먹듯 합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맞아!' 하고, 타 종교를 살상합니다.
독재 정권들이 있습니다.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북한, 그런 독재 정권들, 자기 사상이 맞고 옳으니까, 자기에게 틀린 것에 대해서는 살상을 가합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반 기독교적인 사상들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스라엘은 우리의 성지야!' '이슬람! 네가 우리 성지를 점령해?'하고, 100년 동안 이슬람에 대해 공격을 가합니다. 이것이 반 기독교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옳다고 할 때, 옳은 것을 생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력까지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인이 저지른 '반 기독교 전쟁'입니다. 아주 많습니다. '칼빈'도 제네바에서 자기가 신정통치를 행할 때, 반대한 사람들을 숙청합니다. 목을 자르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입니다.
지금 신교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최근에 '봉은사'에서 어느 교회입니까? '땅 밟기', 다 같은 것입니다. 왜? 남의 종교에 가서 땅 밟기를 합니까? 여러분은 좋습니까? '불교인'들이 '기독교'에 와서 '땅 밟기'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 이념이 맞아!' '너! 내 이념 속으로 들어와 하고, '교회당' 예배당 모임의 한 일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또는 '이념의 주입'입니다. '음! 너는 칼빈의 "기독교 강론"을 배워야 해!' 이념을 주입시킵니다. 또는 '웨스트민스터의 소요리 문답', '음! 이것 알아야 해!'먹입니다. '너! 이것 먹어!' 과연 그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정말 기독교인이 될까요? 안됩니다! 여러분! 기독교라는 것은 '이념'이라든가 이런 '사상'들이 아닙니다.
'옳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귀신'입니다. '악한 영'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만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물론 자녀는 더 사랑합니다.
'이념'이라든가 '사상'들은 '강압성'을 두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벌써 미혹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용서하며, 이해하고,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며, 정의롭게 행하며, 음란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사상적 종교'가 아닙니다. '삶의 종교'입니다. '내가 사는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고 실천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이념의 동의'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 말씀대로 행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행하지 않고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은 마치, 과거에 '볼셰비키 혁명'과 똑같은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 혁명이 구원해 줍니까? 아닙니다. 혁명적 구원이 구원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님의 사랑으로 동화되고, 죄를 회개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보여주면서, 남들이 거기에 동의해 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국주의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독일'이, 전세계 열방을 다 먹습니다. 그 다음에 선교사가 따라갑니다. 과연 식민지에 대해서 전도가 일어났을까요? 잘 안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이 제국주의의 전도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 '따라 해' '예수!'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념과 사상의 동질화나 신념의 동질화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 말씀 행함의 동질화'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행함'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구원은 '빛'의 전파이지, '사상'의 전파가 아닙니다.
철학세계에서도 많이 있습니다. 초기 철학들은 '계몽주의 철학'들이죠. 칸트가 있죠. '계몽주의'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베이컨'이 보니까 '경험론'을 주장합니다. 경험이 더 좋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은 '실존주의'를 전파합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전파합니다. '사르트르'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니까 당연히 '키에르케고르'를 선택하며, '계몽주의자'니까 '칸트'를 선택합니다.
최근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간통죄 폐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 때문에, 열 받아서 '한바탕'하면 됩니까? 안됩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 고 말할 뿐이지, 그것 때문에 막 싸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지배하고, 조선시대는 유교가 지배하고, 지금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지요. 과거에 한 때, 공산주의가 지배하였고, 굉장히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이런 사고들이 우리 사람들을 '개성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 안에 갖고 있는 모든 이념과 사상의 총칭이 '개성'인데, 개성이 다 다릅니다. 70억이 모두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투기도 하며,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 우리는 그냥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하면 됩니다.
'이 보다 더한 것은 악한 자에게서 온다'
이 보다 더한 것, 다시 말하면, 여기서 오버해서 다른 반대파들을 '숙청'하거나, '무력행사'를 한다든가, 이것은 '악한 자', 마귀 곧 귀신'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과거에 국내에서도 '좌파', '우파', 많이 싸운 적이 있지요. 과거에 '좌파'들에 지식인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6.25이후에도 항상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때, '좌파'들이 무력을 행하지 않습니까? 그 무력을 행한 것이 나쁜 것입니다. 항상 '악'이 강할수록,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대부분 '무력적'이고, '욕설'이라든가, '강압적'이거나, 또는 상대방에서도 '공격적'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어기면 지옥 갑니다!'입니다.
제 사고가 굉장히 우파적인 사고입니다. 저는 국내에 있는 골수 '고신파'보다, 더 외골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저는 요즘에 보기 드문 사람으로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만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다투지는 않습니다. 단지 피력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의 사이트에 동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치겠습니다
88. 그러나 너희 말은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 하라. 이보다 더하는 것은 악한 자에게서 온다.
마태복음 8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약속이나, 맹세대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너희 말은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내가 옳아! 내가 맹세코 말하는데! 000하면, 내가 장을 지진다, 이름 석자를 갈아버린다!'는 식으로, 어떤 것을 주장하거나, 어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좀 센 말을 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맹세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표현 쓰는 것 자체가, 자기 주장을 확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 옳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렇다 그렇다'고 표현했는데, 'YES'에 해당됩니다.
'그렇다' 이것은 각각 자기는 다 맞습니다. 누구든지, 종교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교대로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유대교도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기독교도 역시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누구든지 사람은 다 자기 것이 옳은 것입니다.
정치가들도 자기 확신이 있지요.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우리는 정권을 잡아야 돼!' 정치가들도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확신이 지나쳐서 만약에 확신 때문에, 남을 공격하거나 살상을 가한다면,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슬람은 자기가 옳다 해서 살상을 밥 먹듯 합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맞아!' 하고, 타 종교를 살상합니다.
독재 정권들이 있습니다.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북한, 그런 독재 정권들, 자기 사상이 맞고 옳으니까, 자기에게 틀린 것에 대해서는 살상을 가합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반 기독교적인 사상들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스라엘은 우리의 성지야!' '이슬람! 네가 우리 성지를 점령해?'하고, 100년 동안 이슬람에 대해 공격을 가합니다. 이것이 반 기독교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옳다고 할 때, 옳은 것을 생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력까지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인이 저지른 '반 기독교 전쟁'입니다. 아주 많습니다. '칼빈'도 제네바에서 자기가 신정통치를 행할 때, 반대한 사람들을 숙청합니다. 목을 자르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입니다.
지금 신교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최근에 '봉은사'에서 어느 교회입니까? '땅 밟기', 다 같은 것입니다. 왜? 남의 종교에 가서 땅 밟기를 합니까? 여러분은 좋습니까? '불교인'들이 '기독교'에 와서 '땅 밟기'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 이념이 맞아!' '너! 내 이념 속으로 들어와 하고, '교회당' 예배당 모임의 한 일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또는 '이념의 주입'입니다. '음! 너는 칼빈의 "기독교 강론"을 배워야 해!' 이념을 주입시킵니다. 또는 '웨스트민스터의 소요리 문답', '음! 이것 알아야 해!'먹입니다. '너! 이것 먹어!' 과연 그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정말 기독교인이 될까요? 안됩니다! 여러분! 기독교라는 것은 '이념'이라든가 이런 '사상'들이 아닙니다.
'옳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귀신'입니다. '악한 영'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만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물론 자녀는 더 사랑합니다.
'이념'이라든가 '사상'들은 '강압성'을 두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벌써 미혹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용서하며, 이해하고,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며, 정의롭게 행하며, 음란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사상적 종교'가 아닙니다. '삶의 종교'입니다. '내가 사는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고 실천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이념의 동의'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 말씀대로 행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행하지 않고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은 마치, 과거에 '볼셰비키 혁명'과 똑같은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 혁명이 구원해 줍니까? 아닙니다. 혁명적 구원이 구원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님의 사랑으로 동화되고, 죄를 회개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보여주면서, 남들이 거기에 동의해 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국주의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독일'이, 전세계 열방을 다 먹습니다. 그 다음에 선교사가 따라갑니다. 과연 식민지에 대해서 전도가 일어났을까요? 잘 안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이 제국주의의 전도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 '따라 해' '예수!'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념과 사상의 동질화나 신념의 동질화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 말씀 행함의 동질화'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행함'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구원은 '빛'의 전파이지, '사상'의 전파가 아닙니다.
철학세계에서도 많이 있습니다. 초기 철학들은 '계몽주의 철학'들이죠. 칸트가 있죠. '계몽주의'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베이컨'이 보니까 '경험론'을 주장합니다. 경험이 더 좋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은 '실존주의'를 전파합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전파합니다. '사르트르'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니까 당연히 '키에르케고르'를 선택하며, '계몽주의자'니까 '칸트'를 선택합니다.
최근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간통죄 폐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 때문에, 열 받아서 '한바탕'하면 됩니까? 안됩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 고 말할 뿐이지, 그것 때문에 막 싸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지배하고, 조선시대는 유교가 지배하고, 지금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지요. 과거에 한 때, 공산주의가 지배하였고, 굉장히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이런 사고들이 우리 사람들을 '개성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 안에 갖고 있는 모든 이념과 사상의 총칭이 '개성'인데, 개성이 다 다릅니다. 70억이 모두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투기도 하며,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 우리는 그냥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하면 됩니다.
'이 보다 더한 것은 악한 자에게서 온다'
이 보다 더한 것, 다시 말하면, 여기서 오버해서 다른 반대파들을 '숙청'하거나, '무력행사'를 한다든가, 이것은 '악한 자', 마귀 곧 귀신'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과거에 국내에서도 '좌파', '우파', 많이 싸운 적이 있지요. 과거에 '좌파'들에 지식인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6.25이후에도 항상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때, '좌파'들이 무력을 행하지 않습니까? 그 무력을 행한 것이 나쁜 것입니다. 항상 '악'이 강할수록,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대부분 '무력적'이고, '욕설'이라든가, '강압적'이거나, 또는 상대방에서도 '공격적'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어기면 지옥 갑니다!'입니다.
제 사고가 굉장히 우파적인 사고입니다. 저는 국내에 있는 골수 '고신파'보다, 더 외골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저는 요즘에 보기 드문 사람으로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만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다투지는 않습니다. 단지 피력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의 사이트에 동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8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약속이나, 맹세대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너희 말은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내가 옳아! 내가 맹세코 말하는데! 000하면, 내가 장을 지진다, 이름 석자를 갈아버린다!'는 식으로, 어떤 것을 주장하거나, 어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좀 센 말을 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맹세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런 표현 쓰는 것 자체가, 자기 주장을 확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 옳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렇다 그렇다'고 표현했는데, 'YES'에 해당됩니다.
'그렇다' 이것은 각각 자기는 다 맞습니다. 누구든지, 종교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교대로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유대교도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기독교도 역시 확신이 있으니까, 포교하려고 하고, 누구든지 사람은 다 자기 것이 옳은 것입니다.
정치가들도 자기 확신이 있지요.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우리는 정권을 잡아야 돼!' 정치가들도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확신이 지나쳐서 만약에 확신 때문에, 남을 공격하거나 살상을 가한다면,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슬람은 자기가 옳다 해서 살상을 밥 먹듯 합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맞아!' 하고, 타 종교를 살상합니다.
독재 정권들이 있습니다.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북한, 그런 독재 정권들, 자기 사상이 맞고 옳으니까, 자기에게 틀린 것에 대해서는 살상을 가합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반 기독교적인 사상들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스라엘은 우리의 성지야!' '이슬람! 네가 우리 성지를 점령해?'하고, 100년 동안 이슬람에 대해 공격을 가합니다. 이것이 반 기독교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옳다고 할 때, 옳은 것을 생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력까지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인이 저지른 '반 기독교 전쟁'입니다. 아주 많습니다. '칼빈'도 제네바에서 자기가 신정통치를 행할 때, 반대한 사람들을 숙청합니다. 목을 자르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입니다.
지금 신교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최근에 '봉은사'에서 어느 교회입니까? '땅 밟기', 다 같은 것입니다. 왜? 남의 종교에 가서 땅 밟기를 합니까? 여러분은 좋습니까? '불교인'들이 '기독교'에 와서 '땅 밟기'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 이념이 맞아!' '너! 내 이념 속으로 들어와 하고, '교회당' 예배당 모임의 한 일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또는 '이념의 주입'입니다. '음! 너는 칼빈의 "기독교 강론"을 배워야 해!' 이념을 주입시킵니다. 또는 '웨스트민스터의 소요리 문답', '음! 이것 알아야 해!'먹입니다. '너! 이것 먹어!' 과연 그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정말 기독교인이 될까요? 안됩니다! 여러분! 기독교라는 것은 '이념'이라든가 이런 '사상'들이 아닙니다.
'옳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귀신'입니다. '악한 영'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만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물론 자녀는 더 사랑합니다.
'이념'이라든가 '사상'들은 '강압성'을 두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벌써 미혹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용서하며, 이해하고,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며, 정의롭게 행하며, 음란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사상적 종교'가 아닙니다. '삶의 종교'입니다. '내가 사는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고 실천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이념의 동의'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 말씀대로 행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행하지 않고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은 마치, 과거에 '볼셰비키 혁명'과 똑같은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 혁명이 구원해 줍니까? 아닙니다. 혁명적 구원이 구원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님의 사랑으로 동화되고, 죄를 회개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보여주면서, 남들이 거기에 동의해 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국주의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독일'이, 전세계 열방을 다 먹습니다. 그 다음에 선교사가 따라갑니다. 과연 식민지에 대해서 전도가 일어났을까요? 잘 안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이 제국주의의 전도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 '따라 해' '예수!'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념과 사상의 동질화나 신념의 동질화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 말씀 행함의 동질화'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행함'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구원은 '빛'의 전파이지, '사상'의 전파가 아닙니다.
철학세계에서도 많이 있습니다. 초기 철학들은 '계몽주의 철학'들이죠. 칸트가 있죠. '계몽주의'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베이컨'이 보니까 '경험론'을 주장합니다. 경험이 더 좋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은 '실존주의'를 전파합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전파합니다. '사르트르'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니까 당연히 '키에르케고르'를 선택하며, '계몽주의자'니까 '칸트'를 선택합니다.
최근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간통죄 폐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 때문에, 열 받아서 '한바탕'하면 됩니까? 안됩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 고 말할 뿐이지, 그것 때문에 막 싸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지배하고, 조선시대는 유교가 지배하고, 지금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지요. 과거에 한 때, 공산주의가 지배하였고, 굉장히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이런 사고들이 우리 사람들을 '개성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 안에 갖고 있는 모든 이념과 사상의 총칭이 '개성'인데, 개성이 다 다릅니다. 70억이 모두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투기도 하며,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 우리는 그냥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하면 됩니다.
'이 보다 더한 것은 악한 자에게서 온다'
이 보다 더한 것, 다시 말하면, 여기서 오버해서 다른 반대파들을 '숙청'하거나, '무력행사'를 한다든가, 이것은 '악한 자', 마귀 곧 귀신'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과거에 국내에서도 '좌파', '우파', 많이 싸운 적이 있지요. 과거에 '좌파'들에 지식인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6.25이후에도 항상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때, '좌파'들이 무력을 행하지 않습니까? 그 무력을 행한 것이 나쁜 것입니다. 항상 '악'이 강할수록,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대부분 '무력적'이고, '욕설'이라든가, '강압적'이거나, 또는 상대방에서도 '공격적'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어기면 지옥 갑니다!'입니다.
제 사고가 굉장히 우파적인 사고입니다. 저는 국내에 있는 골수 '고신파'보다, 더 외골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저는 요즘에 보기 드문 사람으로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만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다투지는 않습니다. 단지 피력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의 사이트에 동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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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51절
51.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나라와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라고 말하며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1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유대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유대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갈릴리 호수 좌편이 납달리고, 납달리 바로 아래 지역이 스불론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인접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이방의 갈릴리, 지금 여기서 갈릴리를 이방이라 부릅니다. 누가? ‘이사야’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이방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범죄할 때, 그들을 쫓아내시고, 여전히 구전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 되는데, 아벨은 대표적인 사람이죠. 제사를 드린 사람이고,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어지는데, 그 때는 1,000살을 한계로 해서 900세 이상을 다 산 사람들이죠. 근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자꾸 줄어 드는 것이예요. 사람 숫자는 늘어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심지어 노아 때에 와서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방법을 쓰셨는데, 노아 가족만 남겨두고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일어 납니다. 노아 가족만 살아남고 전 지구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만
마태복음 1장(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6절
6. 그런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가 모두 14세대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까지 14세대이며, 바벨론 이주부터 그리스도까지 14세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절입니다. 이 14세대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이 그리스도를 묘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메시아 통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윗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죠.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올거야! 나중에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누군가가 올거야! 나중에 어떤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를 다스리는데, 우리는 꿈같은 삶을 살거야' 하고 구약 내내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 하셨을 때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죠. 이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왕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잘 통치해 잘 먹고 잘 살거야! 우리는 행복할 거야!'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오면, 정치적으로 왕이 되어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는 한 자리 할거야!' 그래서 다툼도 일어납니다. 자기들끼리 '자. 너는 오른편에 앉아 왼편에 앉아!'라고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한 그 이해와 사고가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다음에 모든 수난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시고 부활 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체로써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10일 뒤에 승천하시고 10일 뒤에 오순절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106절
106.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마태복음 106절 말씀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맞지요. 눈이 감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당연히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여러분! 깜깜한 밤에 횃불이 있으면 그 불 때문에 밤이 환하게 밝은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을 보게 되고 눈이 감긴 소경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 그렇죠. 눈이 멀쩡하면 밝음을 느낍니다. 왜? 태양광선을 통해서 사물을 볼 수 있으니까, 밝음을 느낍니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눈이 좋지 않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여러분! 눈만 감으면 어두움입니다. 눈만 뜨면 밝음이고, 이 눈이라는 조그마한 기관 때문에 우리 온몸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것은 육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데, 왜? 영의 세계이냐? 표현할 때, 네 눈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의 눈'이 아니고 '영의 눈'입니다. 동시에 '성하다'는 표현은 '영, 육'에 같이 쓰이는 표현인데, 이 '악하다'는 표현은 영에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구절을 이해하실 때, '아! 이 구절은 영적인 것이구나!'하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 '영의 눈'이 감긴 상태,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감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믿는 자의 악이 어디서 들어올까요? 영의 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영의 눈이 닫힌 상태, 뭐가 들어올까요?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영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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