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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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다시 마귀가 그 분을 심히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의 왕국들과 그 영광 모두를 그 분께 보여주며 그 분께 말했습니다. “만약 내게 엎드려 예배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
오늘은 마태복음 47절 말씀입니다. ‘다시’ 이 다시라고 하는 말은 ‘빵의 시험’ 두 번째는 ‘말씀에 잘못된 해석과 적용의 시험’을 끝내고 반복되기 때문에 다시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시험 할 때 시험의 종류와 횟수는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생 살아갈 동안에 마귀의 시험이 없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거두어서 천국 갈 때까지 마귀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활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시험 말고도 또 다른 종류의 시험이 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마귀가 그분을’ 그 분은 ‘예수님’이시죠. ‘심히 높은 산으로’ 실제로 이스라엘에 있는 산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높은 설악산 같이 높은 고봉우리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산이 낮습니다. ‘심히’라는 말은 이스라엘 북쪽 ‘빌립보’ 지역에 있는 ‘산’들 정도를 말할 것입니다. ‘높은 산으로 데려가’ ‘높은 산’은 높은 위치, 높은 직위 지난 번 시험에서는 ‘성전 꼭대기’였죠. 종교적인 높은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문화적인, 역사적인’ 이런 인간 세상을 말합니다. ‘높은 산’ 높은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왕국들과’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 땅에서의 ‘왕국들과 그 영광 모두를 그 분께 보여주며 그 분께 말했습니다.’ 지금 마귀의 시험 노선이 바뀝니다. 종교적인 높은 위치가 아니라 세상적인 위치에 올려 주고 그리고 세상 영광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만약 내게 엎드려 예배하면’ 그런데 단어는 또 종교적입니다. 지금 세상 영광을 보여주고 단어는 종교적이예요. ‘예배하면’ 누구에게 ‘내게’ ‘마귀에게’죠.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 지금 마귀는 종교적인 예배를 조건을 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곧 ‘세상을 주겠다’하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시험이며 사람들이 많이 겪는 시험입니다. 마귀는 뿔 달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결코 인간에게 나타나서 자기를 마귀라고 하지 않습니다. ‘난 마귀인데 말이야!’할 때 여러분이 두 번째를 이긴 사람이 그것을 믿고 따라가겠습니까? 마귀가 나타나서 ‘나는 마귀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을 가장합니다. 어느 마귀가 미쳤다고 ‘예배하면’할 때 하나님을 가장해서 말을 하지 마귀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서 만약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말은 하나님입니다.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서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정상적입니까? 정상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 축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진정으로 예배한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지 언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예배를 무시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을 이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을 가장하고 우리에게 와서 종교적인 예배를 통하여 축복적인 내용들을 주겠다고 하면 맞는 것 아닙니까? 이 속에 시험이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서 ‘계시적인 시험’이라고 붙였습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해석과 적용의 시험’인데 이것은 ‘계시의 시험’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으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인 것입니다.
계시를 받습니다. 그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은사나 계시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많은 계시들은 대부분 개인적입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대부분의 위대한 사람들은 영적인 양아치들입니다. “여러분! 나는 영분별이 강해, ‘이것은 마귀이고, 이 분은 하나님이야’라고 분별합니다.” 그런 미친 말하지 마십시오! 환상이나 입신이나 음성이나 유체이탈이나 어떤 것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보자마자 “넌 마귀 당신은 하나님” 못 합니다! 그런 양아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휴거를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 대 환란을 알고 싶습니까? 재림을 알고 싶습니까? 666을 알고 싶습니까? 천년왕국을 알고 싶습니까? 영계를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성경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릭조이너 같은 양아치들에게 귀를 기울입니까?
왜 양아치라고 부르냐고요? 제가 어렸을 적에는 양아치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넝마주이처럼 삶을 살았습니다. 양아치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선량하지만 또 조폭은 아닙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양아치가 있습니다. 그들은 선량합니다. 그런데 양아치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양아치에게서 쓰레기를 줍는 것입니다. 케네스해긴도 비슷한 류입니다. 종교에 있는 많은 분들이 양아치입니다.
저는 프란치스를 존경합니다. 프란치스의 삶과 그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비교가 됩니까? 이상한 계시들 반짝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은 양아치들이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로마에 가면 환란을 받는다.’고 계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을 선택합니다. 선택해서 받은 것은 유라굴라의 태풍입니다. 뱀에 물리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 감옥에 갇힙니다. 또 거기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들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가지 않았으면 순교하지 않았겠지요. 편하게 살았겠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계시를 받고도 그것을 택합니다. 무엇 때문에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많은 계시들은 계시 받는 사람이나 교회가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양아치입니다. ‘넝마주이’처럼 ‘줍습니다’. 자기가 잘 되는 것, 부흥하는 것, 올라서는 것, 높은데 올라가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며 자기에게 임한 약속으로 주워 담습니다. 양아치니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항상 약속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따르면 네가 하늘의 상이 크겠고’ 다 하늘의 상입니다. ‘세상왕국’, ‘형통’, ‘소원성취’, ‘부흥’, ‘번영’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를 따르면 세상 영광을 주겠다는 말씀은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나를 따르면 이런 고난이 와, 핍박이 와, 고통이 와!, 너 따를래? 대신에 내가 너에게 영생을 줄께!’ 여러분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위하여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나 집이나 전토를 버리는 자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따라가며 예배하는 것에 있어서 마귀는 항상 ‘세상 영광’이나 ‘소원성취’로 유혹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시가 잘못되는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근본 마음 뿌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살아있으면 하나님께서 바른 계시를 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뿌리가 하나님이 아닌 것에 있기 때문에 잘못된 계시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상당수는 그런 계시를 추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뿌리가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 번째 시험의 내용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천국 지옥에 다녀오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에수님이 지옥을 53번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양아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진짜가 없냐고요? 진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0에 1명입니다. 100에 1명이 받은 계시를 알기 위해서 수많은 양아치들의 오염된 것들을 듣고 싶으십니까?
우리 안에 귀신이 제압되어야만 성령님의 바른 계시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아직 능력이 약해서 귀신을 제압하는 능력이 약하니까 자꾸 귀신이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귀신이 주는 계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것입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여러분 매일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깨끗하지 않으면 귀신은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계속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거룩하지 않냐고요? 간단합니다. 샤워를 매일 하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매일 주님의 보혈로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 냄새가 나는 상태로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오겠습니까? 여러분의 계시가 잘못되는 이유는 여러분이 씻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예배하면’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마귀에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합 당시에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정통 공주가 아니고 이방의 공주이죠. 이스라엘 국가적인 안녕을 위해서 이세벨 공주를 아합과 정략 결혼을 시킵니다. 이세벨이 자기가 믿고 섬겼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 그리고 이단사설을 가지고 북이스라엘에들어옵니다. 바알이 뭡니까?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아세라 다산의 신입니다. 번영의 신입니다. 이스라엘은 산당이 많았죠.
지금 예배를 드리는데 ‘내가 너를 부요케 하리가.’ ‘내가 너에게 축복하리라.’ 축복 이것이 이세벨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아멘’합니다. 누구한테 예배 드리냐고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마귀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 왕국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입니다. 축복입니다. 소원성취입니다.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실상은 ‘마귀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약속까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 예언을 합니다. 예언을 하는데 “내가 너를 높여 주겠다.” 미혹입니다. 놀라운 계사를 받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해주겠다.” 미혹입니다. “내가 네 교회를 부흥시켜 주겠다” 미혹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교회 내에 무엇이 들어왔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싹 사라지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우상이며 666이며 마귀입니다. 여러분은 ‘아멘’합니다. 목회자도 ‘아멘’합니다. ‘와 참된 예언이야’ 아직도 그것을 구분 못합니까? 마귀는 모든 초점을 ‘여러분의 영광’에 맞춥니다.
그 때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엘리야는 3년 동안 까마귀가 주는 것을 먹고 산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지지리 가난했지요. 시냇물은 말라갑니다. 엘리야가 촌놈입니다. 엘리야는 신학도 안했습니다. 엘리야는 ‘정통적인 선지자’도 아닙니다. 아합에게 와서 ‘내 말이 아니면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리라’ 세상에서 비는 풍요입니다. 비가 와야 잘 삽니다.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뭄 주시는 분이냐? 묻습니다. 엘리야가 하는 말이 믿거나 말거나 하고 사렙다 과부에게 도망갑니다. 거기 가서 밀가루 반죽해서 남의 것으로 먹고 살아갑니다. 3년 반 정도 비가 오지 않았죠.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 신들에게 ‘왜 비가 안 내리냐? 가뭄이 왜 오냐?“고 기도했겠죠. 왔습니까? 안 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대결합니다. 비가 오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믿는 신이 진짜 신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들이 옷을 찢으면서 제단 앞에 불이 떨어지길 기도하지만 불이 안 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제단 주변에다 물을 붓게 합니다. 그리고 불이 떨어집니다. 그럴 때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가 옵니다. 여러분 비가 복이 아닙니다. 풍요가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엘리야가 지금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참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과 정확하게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지금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마귀와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교회 내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천지입니다. 850명입니다. 엘리야는 1명입니다. 850명이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번영의 신입니다. 축복의 신입니다. 비를 내리게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번영이라는 마귀’에게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엘리야가 믿는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돌아오셔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47절 말씀입니다. ‘다시’ 이 다시라고 하는 말은 ‘빵의 시험’ 두 번째는 ‘말씀에 잘못된 해석과 적용의 시험’을 끝내고 반복되기 때문에 다시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시험 할 때 시험의 종류와 횟수는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생 살아갈 동안에 마귀의 시험이 없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거두어서 천국 갈 때까지 마귀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활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시험 말고도 또 다른 종류의 시험이 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마귀가 그분을’ 그 분은 ‘예수님’이시죠. ‘심히 높은 산으로’ 실제로 이스라엘에 있는 산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높은 설악산 같이 높은 고봉우리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산이 낮습니다. ‘심히’라는 말은 이스라엘 북쪽 ‘빌립보’ 지역에 있는 ‘산’들 정도를 말할 것입니다. ‘높은 산으로 데려가’ ‘높은 산’은 높은 위치, 높은 직위 지난 번 시험에서는 ‘성전 꼭대기’였죠. 종교적인 높은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문화적인, 역사적인’ 이런 인간 세상을 말합니다. ‘높은 산’ 높은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왕국들과’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 땅에서의 ‘왕국들과 그 영광 모두를 그 분께 보여주며 그 분께 말했습니다.’ 지금 마귀의 시험 노선이 바뀝니다. 종교적인 높은 위치가 아니라 세상적인 위치에 올려 주고 그리고 세상 영광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만약 내게 엎드려 예배하면’ 그런데 단어는 또 종교적입니다. 지금 세상 영광을 보여주고 단어는 종교적이예요. ‘예배하면’ 누구에게 ‘내게’ ‘마귀에게’죠.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 지금 마귀는 종교적인 예배를 조건을 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곧 ‘세상을 주겠다’하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시험이며 사람들이 많이 겪는 시험입니다. 마귀는 뿔 달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결코 인간에게 나타나서 자기를 마귀라고 하지 않습니다. ‘난 마귀인데 말이야!’할 때 여러분이 두 번째를 이긴 사람이 그것을 믿고 따라가겠습니까? 마귀가 나타나서 ‘나는 마귀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을 가장합니다. 어느 마귀가 미쳤다고 ‘예배하면’할 때 하나님을 가장해서 말을 하지 마귀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서 만약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말은 하나님입니다.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서 축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정상적입니까? 정상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 축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진정으로 예배한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지 언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예배를 무시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을 이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을 가장하고 우리에게 와서 종교적인 예배를 통하여 축복적인 내용들을 주겠다고 하면 맞는 것 아닙니까? 이 속에 시험이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서 ‘계시적인 시험’이라고 붙였습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해석과 적용의 시험’인데 이것은 ‘계시의 시험’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으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인 것입니다.
계시를 받습니다. 그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은사나 계시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많은 계시들은 대부분 개인적입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대부분의 위대한 사람들은 영적인 양아치들입니다. “여러분! 나는 영분별이 강해, ‘이것은 마귀이고, 이 분은 하나님이야’라고 분별합니다.” 그런 미친 말하지 마십시오! 환상이나 입신이나 음성이나 유체이탈이나 어떤 것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보자마자 “넌 마귀 당신은 하나님” 못 합니다! 그런 양아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휴거를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 대 환란을 알고 싶습니까? 재림을 알고 싶습니까? 666을 알고 싶습니까? 천년왕국을 알고 싶습니까? 영계를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성경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릭조이너 같은 양아치들에게 귀를 기울입니까?
왜 양아치라고 부르냐고요? 제가 어렸을 적에는 양아치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넝마주이처럼 삶을 살았습니다. 양아치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선량하지만 또 조폭은 아닙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양아치가 있습니다. 그들은 선량합니다. 그런데 양아치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양아치에게서 쓰레기를 줍는 것입니다. 케네스해긴도 비슷한 류입니다. 종교에 있는 많은 분들이 양아치입니다.
저는 프란치스를 존경합니다. 프란치스의 삶과 그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비교가 됩니까? 이상한 계시들 반짝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은 양아치들이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로마에 가면 환란을 받는다.’고 계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을 선택합니다. 선택해서 받은 것은 유라굴라의 태풍입니다. 뱀에 물리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 감옥에 갇힙니다. 또 거기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들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가지 않았으면 순교하지 않았겠지요. 편하게 살았겠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계시를 받고도 그것을 택합니다. 무엇 때문에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많은 계시들은 계시 받는 사람이나 교회가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양아치입니다. ‘넝마주이’처럼 ‘줍습니다’. 자기가 잘 되는 것, 부흥하는 것, 올라서는 것, 높은데 올라가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며 자기에게 임한 약속으로 주워 담습니다. 양아치니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항상 약속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따르면 네가 하늘의 상이 크겠고’ 다 하늘의 상입니다. ‘세상왕국’, ‘형통’, ‘소원성취’, ‘부흥’, ‘번영’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를 따르면 세상 영광을 주겠다는 말씀은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나를 따르면 이런 고난이 와, 핍박이 와, 고통이 와!, 너 따를래? 대신에 내가 너에게 영생을 줄께!’ 여러분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위하여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나 집이나 전토를 버리는 자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따라가며 예배하는 것에 있어서 마귀는 항상 ‘세상 영광’이나 ‘소원성취’로 유혹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시가 잘못되는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근본 마음 뿌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살아있으면 하나님께서 바른 계시를 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뿌리가 하나님이 아닌 것에 있기 때문에 잘못된 계시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상당수는 그런 계시를 추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뿌리가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 번째 시험의 내용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천국 지옥에 다녀오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에수님이 지옥을 53번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양아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진짜가 없냐고요? 진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0에 1명입니다. 100에 1명이 받은 계시를 알기 위해서 수많은 양아치들의 오염된 것들을 듣고 싶으십니까?
우리 안에 귀신이 제압되어야만 성령님의 바른 계시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아직 능력이 약해서 귀신을 제압하는 능력이 약하니까 자꾸 귀신이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귀신이 주는 계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것입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여러분 매일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깨끗하지 않으면 귀신은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계속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거룩하지 않냐고요? 간단합니다. 샤워를 매일 하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매일 주님의 보혈로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 냄새가 나는 상태로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오겠습니까? 여러분의 계시가 잘못되는 이유는 여러분이 씻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예배하면’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마귀에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합 당시에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정통 공주가 아니고 이방의 공주이죠. 이스라엘 국가적인 안녕을 위해서 이세벨 공주를 아합과 정략 결혼을 시킵니다. 이세벨이 자기가 믿고 섬겼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 그리고 이단사설을 가지고 북이스라엘에들어옵니다. 바알이 뭡니까?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아세라 다산의 신입니다. 번영의 신입니다. 이스라엘은 산당이 많았죠.
지금 예배를 드리는데 ‘내가 너를 부요케 하리가.’ ‘내가 너에게 축복하리라.’ 축복 이것이 이세벨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아멘’합니다. 누구한테 예배 드리냐고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마귀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 왕국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입니다. 축복입니다. 소원성취입니다.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실상은 ‘마귀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약속까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 할렐루야!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 예언을 합니다. 예언을 하는데 “내가 너를 높여 주겠다.” 미혹입니다. 놀라운 계사를 받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해주겠다.” 미혹입니다. “내가 네 교회를 부흥시켜 주겠다” 미혹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교회 내에 무엇이 들어왔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싹 사라지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우상이며 666이며 마귀입니다. 여러분은 ‘아멘’합니다. 목회자도 ‘아멘’합니다. ‘와 참된 예언이야’ 아직도 그것을 구분 못합니까? 마귀는 모든 초점을 ‘여러분의 영광’에 맞춥니다.
그 때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엘리야는 3년 동안 까마귀가 주는 것을 먹고 산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지지리 가난했지요. 시냇물은 말라갑니다. 엘리야가 촌놈입니다. 엘리야는 신학도 안했습니다. 엘리야는 ‘정통적인 선지자’도 아닙니다. 아합에게 와서 ‘내 말이 아니면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리라’ 세상에서 비는 풍요입니다. 비가 와야 잘 삽니다.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뭄 주시는 분이냐? 묻습니다. 엘리야가 하는 말이 믿거나 말거나 하고 사렙다 과부에게 도망갑니다. 거기 가서 밀가루 반죽해서 남의 것으로 먹고 살아갑니다. 3년 반 정도 비가 오지 않았죠.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 신들에게 ‘왜 비가 안 내리냐? 가뭄이 왜 오냐?“고 기도했겠죠. 왔습니까? 안 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대결합니다. 비가 오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믿는 신이 진짜 신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들이 옷을 찢으면서 제단 앞에 불이 떨어지길 기도하지만 불이 안 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제단 주변에다 물을 붓게 합니다. 그리고 불이 떨어집니다. 그럴 때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가 옵니다. 여러분 비가 복이 아닙니다. 풍요가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엘리야가 지금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참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과 정확하게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지금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마귀와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교회 내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천지입니다. 850명입니다. 엘리야는 1명입니다. 850명이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번영의 신입니다. 축복의 신입니다. 비를 내리게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번영이라는 마귀’에게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엘리야가 믿는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돌아오셔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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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51절
51.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나라와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라고 말하며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1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유대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유대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갈릴리 호수 좌편이 납달리고, 납달리 바로 아래 지역이 스불론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인접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이방의 갈릴리, 지금 여기서 갈릴리를 이방이라 부릅니다. 누가? ‘이사야’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이방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범죄할 때, 그들을 쫓아내시고, 여전히 구전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 되는데, 아벨은 대표적인 사람이죠. 제사를 드린 사람이고,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어지는데, 그 때는 1,000살을 한계로 해서 900세 이상을 다 산 사람들이죠. 근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자꾸 줄어 드는 것이예요. 사람 숫자는 늘어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심지어 노아 때에 와서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방법을 쓰셨는데, 노아 가족만 남겨두고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일어 납니다. 노아 가족만 살아남고 전 지구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만
마태복음 1장(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6절
6. 그런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가 모두 14세대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까지 14세대이며, 바벨론 이주부터 그리스도까지 14세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절입니다. 이 14세대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이 그리스도를 묘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메시아 통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윗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죠.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올거야! 나중에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누군가가 올거야! 나중에 어떤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를 다스리는데, 우리는 꿈같은 삶을 살거야' 하고 구약 내내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 하셨을 때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죠. 이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왕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잘 통치해 잘 먹고 잘 살거야! 우리는 행복할 거야!'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오면, 정치적으로 왕이 되어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는 한 자리 할거야!' 그래서 다툼도 일어납니다. 자기들끼리 '자. 너는 오른편에 앉아 왼편에 앉아!'라고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한 그 이해와 사고가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다음에 모든 수난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시고 부활 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체로써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10일 뒤에 승천하시고 10일 뒤에 오순절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106절
106.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마태복음 106절 말씀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맞지요. 눈이 감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당연히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여러분! 깜깜한 밤에 횃불이 있으면 그 불 때문에 밤이 환하게 밝은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을 보게 되고 눈이 감긴 소경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 그렇죠. 눈이 멀쩡하면 밝음을 느낍니다. 왜? 태양광선을 통해서 사물을 볼 수 있으니까, 밝음을 느낍니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눈이 좋지 않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여러분! 눈만 감으면 어두움입니다. 눈만 뜨면 밝음이고, 이 눈이라는 조그마한 기관 때문에 우리 온몸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것은 육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데, 왜? 영의 세계이냐? 표현할 때, 네 눈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의 눈'이 아니고 '영의 눈'입니다. 동시에 '성하다'는 표현은 '영, 육'에 같이 쓰이는 표현인데, 이 '악하다'는 표현은 영에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구절을 이해하실 때, '아! 이 구절은 영적인 것이구나!'하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 '영의 눈'이 감긴 상태,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감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믿는 자의 악이 어디서 들어올까요? 영의 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영의 눈이 닫힌 상태, 뭐가 들어올까요?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영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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