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6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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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온유한 자들은 복있으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63절합니다.
‘온유한 자들은 복 있으니’ 오늘 말씀은 세 번째로 ‘온유’입니다. 이 8가지 항목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특성들입니다. 우리에게 8가지 가운데, 한 두 가지만 갖고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해야 합니다.
8가지 가운데 한 두 개가 없으면, 구원을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팔복’은 의인의 특성입니다. ‘의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것입니다. ‘온유’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참 부드러워’, ‘참 착해’, ‘그 사람 화를 잘 안내’,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뭘 시켰는데, ‘억지로 하는 힘’입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시킨 것을,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계명대로 살고 싶습니까? 십계명을 읽는 순간! “아!~ 나! 저거 되게 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말합니까? 그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산상 수훈을 끝까지 읽은 다음에, “야~ 어떻게 내 마음을 저렇게 잘 알까? 나 항상 저렇게 살고 싶은데!”, 이런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보면, 솔직히 다 하기 싫은 것들입니다. 성경에 계명이라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아!~ 저 사람 저렇게 타고 났나 봐, 저렇게 타고 나서 저렇게 하는 것이 좋은가봐!‘,하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성경말씀, 하나님의 뜻, 계명은,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우리가 싫어하는데, 날 때부터 우리는 우리 안에 귀신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씀 드렸죠.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귀신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다행히 내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이 바로 내 영입니다. 거듭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지만, ’이 성령님께서 귀신과 내 영을 이기시고, 계명에 순종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인격을 초월하지 않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말씀과 계명대로 순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는 무엇이냐? ‘온유’는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어거하는 힘, 이것을 ‘심리학용어’로 ‘초자아’라 부르죠. 마음대로 미워하고 싶고, 마음대로 음란하고 싶고, 마음대로 거짓말하고 싶고, 마음대로 탐내고 싶고, 마음대로 분출하고 싶은 욕망 곧 자아가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런 자아의 ‘죄성’을 어거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원래 ‘온유’라는 말의 원어는, 말에게 ‘재갈 물린다’는 것입니다. 말은 자기 맘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말 한번 타 보십시오! 재갈 물리지 않으면, 그냥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재갈을 물리고 당기면, 아파서 할 수 없이, 할 수 없이, 우리를 태우는 것입니다. 코를 뚫으면 아프거든요. 할 수 없습니다. 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빨리 뛰게 합니까? 채찍을 가합니다. 그러면 아파서 달리는 것입니다. 말이 우리 말 잘 듣고 싶어서 가는 줄 아십니까?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나온 사람이 있는데 모세입니다. 모세의 온유가 지면에서 가장 승하였다. 모세는 원래 혈기가 많았어요. 자기가 히브리 민족으로 태어났으니까, 자기 민족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 사람에게 고통을 당하니까, 두 명을 죽여 버립니다. 그 정도로 모세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고, 모세는 분노를 잘 내는 사람이고, 불의를 못 참는 성격입니다. 타고난 성격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 들어가서 40년 동안 뭐했겠습니까? 내 성질 죽이기, 또 죽고, 또 죽고, 하면서 뭘 배웠습니까? 온유를 배웠을 것입니다.
이 모세의 성격이 언제 드러납니까? 모세의 사역이 40년 다다를 때, 백성이 또 원망하고 불평하니까, 모세가 열 받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모세는 온유로 잘 참았습니다. 모세는 온유가 많기 때문에, 또 참고, 또 참고, 말씀대로 살아야지, 뜻대로 살아야지, 잘 참다가, 막판에 말만하면 되는 것을 가지고, 열 받아서 반석을 두 번 칩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모세에게 분노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잘 참았는데,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모세에게 혈기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엘리야도 내부적으로 우울증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언제 드러납니까? 엘리야가 영적인 큰 대승을 거두고, 이세벨이 쫓아올 때, 그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합니다. 사실은 내부적으로 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뭐 했습니까? 참은 것입니다. 엘리야도 우울증을 참고 또 참고, 또 견디고 또 견디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든지 다 각각의 내부적인 한 두가지 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또 참습니다. 왜 참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계명 때문에, 참는 능력, 이것이 ‘온유’입니다.
부단한 노력과 부단한 애씀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러분! 제가 강해한 십계명 가운데 7계명이 인기가 좋더라구요. 여러분! 음란을 버리는데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란이 가득 차 있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굶으면 됩니다. 여러분! 지옥 가는 사람들은, 음란을 만날 때, “난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음란을 만날 때, 음란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금식하며 고행하는 노력을 합니다. 예수님은 눈을 뽑으라고 말씀하시며, 손을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애씀이 온유입니다.
죄를 만날 때,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온유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온유’라는 것은 타고난 성격이 아닙니다. 모세같이 타고난 성격이 혈기 많은 사람이 계명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죄와 싸울 때,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죄를 못 이깁니다. 여러분! 죄를 못 이기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고행을 많이 했지요. 딴 것 아닙니다. 굶는 것입니다. 굶으십시오! 굶으면 웬만한 죄들은 다 끊어집니다. 죄에서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죄가 생각이 안 납니다. 죄도 탐닉입니다. 죄는 한 번 지으면 더 죄와 가까워 집니다. 미움도 음란도 탐심도, 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여러분! 죄를 끊기로 결단을 내리면,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새 땅이 옵니다. 새 나라가 옵니다. 새 삶이 옵니다. 여러분! 죄가 멀어지면, 내 삶에 새로운 땅이 옵니다. 새로운 마음이 옵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 들어갑니다. 현실적으로는 우리에게 새 땅이 옵니다. 가나안 땅은 지리적인 땅이 아닙니다. 이 땅은 의의 땅입니다. 또 순종의 땅입니다. 이 땅은 죄에 얽매이지 않는, ‘죄의 구습’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땅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십시오! 그러면 대가가 옵니다. 여러분이 죄에 얽매인 상태에서는, 결코 가나안은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계명을 어기는 상태에서는 결코 가나안은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계명을 준수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지킬 수 없다고 느끼는 그 말씀들, 끊지 못하는 죄악들, 그것을 끊기로 결단을 내리고, 노력하고 애쓰고 하면, 여러분의 삶에 가나안이 옵니다.
가나안땅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여러분이 그 땅을 맛보려면, 온유해야 합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1,000번 이상의 실패를 거듭하고 성공한 것처럼, 어떤 특정 죄를 끊기 위해서는, 천 번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이 온유입니다.
여러분! 천국 그냥 못 갑니다. 여러분! 계명을 어기면 천국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를 끊지 않으면 천국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온유로 죄를 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삶을 주시며, 우리 마음에는 항상 기쁘고 평안한 삶이라는 가나안땅 곧 축복의 땅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63절합니다.
‘온유한 자들은 복 있으니’ 오늘 말씀은 세 번째로 ‘온유’입니다. 이 8가지 항목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특성들입니다. 우리에게 8가지 가운데, 한 두 가지만 갖고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해야 합니다.
8가지 가운데 한 두 개가 없으면, 구원을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팔복’은 의인의 특성입니다. ‘의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것입니다. ‘온유’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참 부드러워’, ‘참 착해’, ‘그 사람 화를 잘 안내’,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뭘 시켰는데, ‘억지로 하는 힘’입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시킨 것을,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계명대로 살고 싶습니까? 십계명을 읽는 순간! “아!~ 나! 저거 되게 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말합니까? 그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산상 수훈을 끝까지 읽은 다음에, “야~ 어떻게 내 마음을 저렇게 잘 알까? 나 항상 저렇게 살고 싶은데!”, 이런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보면, 솔직히 다 하기 싫은 것들입니다. 성경에 계명이라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아!~ 저 사람 저렇게 타고 났나 봐, 저렇게 타고 나서 저렇게 하는 것이 좋은가봐!‘,하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성경말씀, 하나님의 뜻, 계명은,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우리가 싫어하는데, 날 때부터 우리는 우리 안에 귀신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씀 드렸죠.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귀신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다행히 내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이 바로 내 영입니다. 거듭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지만, ’이 성령님께서 귀신과 내 영을 이기시고, 계명에 순종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인격을 초월하지 않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말씀과 계명대로 순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는 무엇이냐? ‘온유’는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어거하는 힘, 이것을 ‘심리학용어’로 ‘초자아’라 부르죠. 마음대로 미워하고 싶고, 마음대로 음란하고 싶고, 마음대로 거짓말하고 싶고, 마음대로 탐내고 싶고, 마음대로 분출하고 싶은 욕망 곧 자아가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런 자아의 ‘죄성’을 어거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원래 ‘온유’라는 말의 원어는, 말에게 ‘재갈 물린다’는 것입니다. 말은 자기 맘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말 한번 타 보십시오! 재갈 물리지 않으면, 그냥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재갈을 물리고 당기면, 아파서 할 수 없이, 할 수 없이, 우리를 태우는 것입니다. 코를 뚫으면 아프거든요. 할 수 없습니다. 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빨리 뛰게 합니까? 채찍을 가합니다. 그러면 아파서 달리는 것입니다. 말이 우리 말 잘 듣고 싶어서 가는 줄 아십니까?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나온 사람이 있는데 모세입니다. 모세의 온유가 지면에서 가장 승하였다. 모세는 원래 혈기가 많았어요. 자기가 히브리 민족으로 태어났으니까, 자기 민족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 사람에게 고통을 당하니까, 두 명을 죽여 버립니다. 그 정도로 모세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고, 모세는 분노를 잘 내는 사람이고, 불의를 못 참는 성격입니다. 타고난 성격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 들어가서 40년 동안 뭐했겠습니까? 내 성질 죽이기, 또 죽고, 또 죽고, 하면서 뭘 배웠습니까? 온유를 배웠을 것입니다.
이 모세의 성격이 언제 드러납니까? 모세의 사역이 40년 다다를 때, 백성이 또 원망하고 불평하니까, 모세가 열 받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모세는 온유로 잘 참았습니다. 모세는 온유가 많기 때문에, 또 참고, 또 참고, 말씀대로 살아야지, 뜻대로 살아야지, 잘 참다가, 막판에 말만하면 되는 것을 가지고, 열 받아서 반석을 두 번 칩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모세에게 분노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잘 참았는데,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모세에게 혈기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엘리야도 내부적으로 우울증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언제 드러납니까? 엘리야가 영적인 큰 대승을 거두고, 이세벨이 쫓아올 때, 그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합니다. 사실은 내부적으로 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뭐 했습니까? 참은 것입니다. 엘리야도 우울증을 참고 또 참고, 또 견디고 또 견디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든지 다 각각의 내부적인 한 두가지 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또 참습니다. 왜 참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계명 때문에, 참는 능력, 이것이 ‘온유’입니다.
부단한 노력과 부단한 애씀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러분! 제가 강해한 십계명 가운데 7계명이 인기가 좋더라구요. 여러분! 음란을 버리는데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란이 가득 차 있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굶으면 됩니다. 여러분! 지옥 가는 사람들은, 음란을 만날 때, “난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음란을 만날 때, 음란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금식하며 고행하는 노력을 합니다. 예수님은 눈을 뽑으라고 말씀하시며, 손을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애씀이 온유입니다.
죄를 만날 때,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온유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온유’라는 것은 타고난 성격이 아닙니다. 모세같이 타고난 성격이 혈기 많은 사람이 계명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죄와 싸울 때,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죄를 못 이깁니다. 여러분! 죄를 못 이기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고행을 많이 했지요. 딴 것 아닙니다. 굶는 것입니다. 굶으십시오! 굶으면 웬만한 죄들은 다 끊어집니다. 죄에서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죄가 생각이 안 납니다. 죄도 탐닉입니다. 죄는 한 번 지으면 더 죄와 가까워 집니다. 미움도 음란도 탐심도, 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여러분! 죄를 끊기로 결단을 내리면,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새 땅이 옵니다. 새 나라가 옵니다. 새 삶이 옵니다. 여러분! 죄가 멀어지면, 내 삶에 새로운 땅이 옵니다. 새로운 마음이 옵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 들어갑니다. 현실적으로는 우리에게 새 땅이 옵니다. 가나안 땅은 지리적인 땅이 아닙니다. 이 땅은 의의 땅입니다. 또 순종의 땅입니다. 이 땅은 죄에 얽매이지 않는, ‘죄의 구습’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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