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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마귀시험)54절



54.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들을 버려두고 그 분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54절입니다. ‘그러자’ 그러자는 예수님께서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와라’ 하고 부른 다음 ‘네가 나를 따라 오면, 내가 너희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는 약속을 주신 그 때 ‘그러자’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들으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집에 가자마자, ‘나 오늘 집을 떠나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거든요’,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무턱대고 또는 비상식적으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큰 충격을 만나면, 자기 집에 가서, 엄마에게 ‘나 집을 떠나야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자’라는, 이 말은 거기에 대한 말이 생략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그들의 그물들을 버려두고’ 지금 그물들을 버려두고, 이것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부모들도 어부였다고 볼 수 있는 확률이 큽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다음에 연속되는 이야기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려두고’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배를 임대해서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적은 배’ 였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153마리를 배에 담았을 때에, 굉장히 기뻐합니다. 보통 우리가 기뻐할 정도이면 보통의 양보다 10배 정도, 아니면 적어도 3배는 넘어야겠지요.


갈릴리에는 큰 고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153마리에 놀랄 정도라면, 배가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부요한 집은 아닐 것입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그 분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지금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버려두었다는 말인데, 베드로는 부인이 있었지요. 장모도 있고, 그리고 아버지도 있었고, 지금 베드로는 나이가 많지만 안드레는 나이가 적었습니다. 가버나움에 살았구요. 그러니까 나중에 베드로 장모가 열병에 시달렸을 때, 가버나움에 가셔서 손을 얹으시자 열병이 떠났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가족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생각 하실 때, ‘그물 버리는 것’, ‘그물 얼마나 되겠어?’ 하겠지만,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계의 수단’을 버린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작은 구멍가게를 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생계’를 버린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예수님을 따라면 ‘돈이 생기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안드레가 살아온 과거도 유복하지 않았겠지만, 동시에 내가 이것을 버리면 ‘내가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될 수 있어.’ 이런 것이 아닌 것은, 예수님께서는 세금 낼 돈이 없어서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아오게 해서, 그 고기 입 속에 있는 한 세겔을 가지고 세금을 내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 자신도 숙박의 어려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밤에 산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남자 5천명이 모였을 때, 만약 기금이 있었다면, 빵을 살 것인데 2백 데나리온이 없어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물질이 풍성했다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항상 가난하셨어요. 자! 지금 베드로와 안드레가 ‘내가 누구를 따라야 하는데’, 그물을 버린 이유가, 자기의 현재의 일보다 더 나운 물질이 보장되어서 따른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장막을 지었죠. 왜? 수입 때문에, 사도 바울도 외투가 없어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여러분! 겨울에 외투가 없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물론 옛날에는 옷이 큰 재산 개념이지만, 사도 바울이 만약에 헌금이 많이 들어왔다면, 왜? 그런 고생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사도바울이 세계적인 선교사인지만, 헌금이 많이 안 들어왔습니다. 그냥 장막을 지으며 생활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내가 예수님을 따르면, 제자가 되면, ‘내게 유복함이 있을꺼야’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면, 유복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미혹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오히려 유복해지기가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럽다고 하는 세계와 거리가 먼 세계가 ‘제자의 세계’임을 아셔야 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에 대한 관심과 욕망을 끊어 버리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버려두었다’는 말은, 그런 것에 대한 나의 욕망이 감소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진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재림 할 때는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 한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는, 거의 구원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내가 세상에 올 때는 천하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리라 하고, 또 뭐냐 하면, 인자가 올 때에는 믿음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 때는 소돔같고, 고모라 같고, 노아의 때와 같아서, 거의 극소수가 구원을 약속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점점 말세가 진행이 되면서, 복음은 전파되지만, 구원받는 자는 극소수라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아서, 먹고, 마시며, 장가가고, 시집가고, 심고, 거둔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물질의 부요함을 말합니다. 여러분! 물질의 부요함은 점점 가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 계시록에서 ‘바벨론’의 멸망은 이 땅의 불의 멸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음부의 멸망입니다. 이 땅은, 점점 부가 많아집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막는 장애물임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많은 이유는, 부요함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자들이 천국에 가기 어렵다고 되어 있지요. 왜? 못 가느냐? 그 부요함 때문입니다. 부요함에 대한 욕망, 부요함에 대한 탐심, 그 부요에 대한 모든 우리의 가치관들이 여러분들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탐심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물을 버려두어야 하는데, 사람은 그 기업이 작든지, 크든지 간에 다 ‘자기 생계’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부요함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서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살다가,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합니다. 가버나움에 같이 갔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혼자서 가버나움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 나중에 예수님이 사역 하실 때, 나사렛에서 동생과 어머니가 찾으러 왔었고, 동시에 예수님이 나사렛에 갔을 때, 나사렛 동네 이웃들이 예수님을 비웃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혼자 가버나움에 갔을 것이고, 가버나움에 혼자 사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예수님도 지금 형편이 좋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어떻게 따라 갔을까요? ‘세례 요한’ 때문이죠. 안드레는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저 분이 메시야시다’라고 듣습니다. 자! ‘메시야’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하면 다윗 왕의 대를 잇는 사람이다. ‘메시야가 선조 ’다윗‘처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다스리면,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다’라는 사상이, ‘메시야’ 사상입니다. 자! 지금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이 때는 로마 폭정 시대입니다. 그리스 시대는 문화정치를 해서 폭정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마 때는 폭정을 가합니다. 이 사람들은 굉장히 시달립니다. 그 때 뭘 기다립니까?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메시야’가 오면 우리는 잘 살 거야‘ ’ 다윗 왕 시대처럼 전 세계를 재패하리라‘, 그런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메시야’라고 들었을 때에, 그렇구나 했는데, 동시에 세례 요한은 이런 설교를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멘붕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어 주셔서 나를 잘 살게 할 거야. 나를 부요케 할 거야. 우리나라가 강해 질 거야!‘하는 그런 상을 갖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그 당시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그럴 분이 아니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서 고난 당하는 어린 양‘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른 사상‘ 이었습니다.


여러분! 쉽게 말하면 재림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초림’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초림의 그리스도는 ‘재림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재림 한 다음에 ‘천년 왕국’이 임하지요. 하지만 ‘초림의 그리스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초림의 그리스도’는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 이 모습입니다. 중요합니다! 지금 안드레가 무엇을 알았냐 하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았고, 동시에 안드레는 이 메시야가 바로 날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대속을 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도 예수를 믿고, ‘내가 뭔가를 이룰 것이다’라는 것은 ‘재림 이후’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도 여러분 똑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기 때문데, ‘내가 예수를 믿으면, 분명히 나에게 뭐가 주어질 것이야’. 이것은 모든 사람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을 통해서 안드레는,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나중에 X자로 순교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메시야를 받아 들일 때, 예수님을 이해 하실 때, 여러분에게도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똑같은 사고가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이 한 자리 하시면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달라고 분란을 일으키죠.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제자들 12명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영광’에 대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메시야’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철저히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을 영광은, 이 땅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따라 가면 영광이 없습니다. 그 영광은 ‘천년 왕국’때 있는 영광이고, 낙원에 있는 영광이고, 천국왕국 후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지, 지금 현재의 영광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가버나움 동네에 살고, 돈도 없어 보이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메시야’라고 설득합니다. 베드로 부인이, ‘당신 미쳤어! 그물을 버려두면, 그깟 몇 푼도 아쉬운 판국인데, 뭐하는 것이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부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부인을 설득한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어. 동시에 ‘안드레’도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했겠지요. ‘아버지! 이 분은 참 메시야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부모님이 ‘그래! 나도 믿을꺼야!’ 그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가족들을 설득했을 때, 가족들이 분명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어떻게 설득되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들이 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행동이 바르면서 효도하고, 음란하지 않고, 탐내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삶을 산 것입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세례 요한은 매일 ‘회개’를 가르칩니다. 매일 같이 죄를 지적하면서, 심지어 세례요한은 그 당시 헤롯의 죄를 지적하고, 여러분! 그렇게 죄를 지적하는 교회에 다니면, 항상 좌불안석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설교할 때, “한동안 평안 하셨지요?”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도들을 볼 때, ‘죄’를 낱낱이 지적합니다. 여러분! 신령한 사람은 ‘사람들의 죄’가 보입니다. 그래서 지적합니다.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안드레는 그러한 교회에 다닌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아 ‘안드레’는 굉장히 건실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왜? 십계명 강해가 없는 줄 아십니까? 설교하는 자기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음란하지 말라’고 말 할 정도면 자기가 ‘음란죄’를 끊어야 합니다. ‘탐내지 말라’라고 하려면 자기가 ‘탐심죄’를 끊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생명이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전합니다.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교회를 다니면서, 안드레는 분명히 굉장한 삶의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베드로가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드레가 베드로를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와 베드로의 ‘삶의 변화’를 보고서, 분명히 베드로의 부인과 장모님과 안드레의 어머니, 아버지가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안드레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증거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드레와 베드로가 그물을 버릴 수 있는 배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자! 안드레와 베드로가 그물을 버린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모든 삶에 유혹과 욕망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그런 욕망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버릴 때에 만이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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