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6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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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3, 2021
65. 불쌍히 여기는 자들은 복있으니, 그들이 불쌍히 여겨질 것이다.
마태복음 65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있으니’, 팔복 가운데 다섯 번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긍휼히 여길까요? 아니면 긍휼히 여기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나는 천국 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만약? ‘난 천국 가니까’ 하면 성경이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은 분명히 천국에 들어가는 길인데, 만약에 ‘나는 천국가는 사람이야!’하고 고정된 사고를 가진다면, 성경은 무엇 때문에 배우고, 보십니까? 그냥, 간단하게, ‘예수를 믿어!’ ‘음!’ ‘아멘!’ ‘예수님! 오세요!’ ‘믿습니다!’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구약의 장구한 스토리를 읽으며 신약을 보십니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구원에 합당해야 합니다. 구원받기 합당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구원에 합당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8가지 특징인데, 이 특징들이 나타나야만 구원에 합당한 자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을 행하는 것이 자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에, ‘그런 긍휼의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지 억지로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잘 들지 않고, 하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마음대로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는 그 긍휼함이 나에게도 나타난다!’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긍휼이라는 성품이 ‘나에게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긍휼이 있습니다. 정말로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자꾸 사용해야 합니다. 쓰면서 개발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어보죠. 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니까! 여러분 인정하시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갔어.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도 그냥 지나갔어.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그의 상처부위를 닦아주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어서 그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여관에서 있게 하면서 부비가 들면 돈을 더 주겠다고 약속 한 것,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제자냐?’라고 할 때, 바리새인이 말하죠!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이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라는 말, 그는 구원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에 나온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천국 못 들어갔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너는 지금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넌 지금 사랑하지 않아! 넌 천국 못 들어가!’ 이 말입니다. 왜? 긍휼을 베푼 자가 사마리아 사람이며, 그 사람은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긍휼을 베푸는 것이 천국의 조건입니다.
여러분들은 두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일까?’ 여러분! 그래서 구원이 어려운 것입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그러죠. 우리가. 믿음이 먼저냐? 행함이 먼저냐? ‘닭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천지 창조하실 때, 닭부터 만들었습니다. 닭이 안보이면 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8가지 항목을 생각 할 때, ‘나중에 될 거야!’ NO!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여러분 주변에 얼마든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멀리 가지 않고서도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린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눈을 더 크게 뜨고, 여러분의 주변을 보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 질병과 물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신적인 고통도 엄청 많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강도 만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긍휼은 행동입니다. 행동이 수반되는 희생입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보고, 막 울고 끝났습니까? ‘아! 정말 불쌍하다!’ ‘아! 가슴 아프다’하고 그냥 지나갑니까? 그것은 제사장입니다. 그것은 레위인입니다. 그것은 긍휼한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반드시 나의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나에게 뭔가의 손실이 따르는 것입니다. 나에게 불이익이 초래되는 것입니다.
성공 지향적인 사람은 천국 가기 힘듭니다. ‘나는 더 잘살아야지’, ‘더 많이 누려야지’, ‘더 많이 올라가야지’, 성공 지향적인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긍휼이 있으면, 성공 지향적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 무슨 성공이 필요합니까?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같이 울고 웃는데 무슨 성공이 필요합니까? 이렇기 때문에, 교회 부흥을 외치는 목사님들 대부분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교회 부흥입니까? 교회 나오는 성도 가운데 못 먹는 사람이 있고, 헐벗은 사람이 있고, 병든 사람이 있는데 무슨 교회 부흥입니까? 섬기느라고 바쁩니다. 그런데 부흥을 꿈꾸는 생각 자체가 미혹된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긍휼이 없어서,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이 있으면, 고통 받는 사람밖에 안 보입니다.
이기적이면 이기적일수록 남의 고통에 둔감해 지면서 자기 고통에 대해서 아주 활성화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더 불쌍히 여기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 있으니, 그들이 불쌍히 여겨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 불쌍히 여기시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희생하면서 섬기고 봉사하는 참된 성도들을, 더욱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내부를 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바꾸어서, 이제는 타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며 이해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전 세계에 이혼률 1위, 자살률 1위, 교통사고 1위입니다. 우리 나라가 GNP는 올라갔지만, 삶의 내용들은 굉장히 피폐합니다. 여러분! 누가 그들을 도울까요?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신다구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과 팔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고통 받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도 역시 나를 긍휼이 여겨 주십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65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있으니’, 팔복 가운데 다섯 번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긍휼히 여길까요? 아니면 긍휼히 여기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나는 천국 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만약? ‘난 천국 가니까’ 하면 성경이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은 분명히 천국에 들어가는 길인데, 만약에 ‘나는 천국가는 사람이야!’하고 고정된 사고를 가진다면, 성경은 무엇 때문에 배우고, 보십니까? 그냥, 간단하게, ‘예수를 믿어!’ ‘음!’ ‘아멘!’ ‘예수님! 오세요!’ ‘믿습니다!’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구약의 장구한 스토리를 읽으며 신약을 보십니까?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구원에 합당해야 합니다. 구원받기 합당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구원에 합당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8가지 특징인데, 이 특징들이 나타나야만 구원에 합당한 자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을 행하는 것이 자생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에, ‘그런 긍휼의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지 억지로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잘 들지 않고, 하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마음대로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는 그 긍휼함이 나에게도 나타난다!’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긍휼이라는 성품이 ‘나에게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긍휼이 있습니다. 정말로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자꾸 사용해야 합니다. 쓰면서 개발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어보죠. 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니까! 여러분 인정하시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갔어.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도 그냥 지나갔어.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그의 상처부위를 닦아주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어서 그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여관에서 있게 하면서 부비가 들면 돈을 더 주겠다고 약속 한 것,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제자냐?’라고 할 때, 바리새인이 말하죠!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이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라는 말, 그는 구원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에 나온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천국 못 들어갔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너는 지금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넌 지금 사랑하지 않아! 넌 천국 못 들어가!’ 이 말입니다. 왜? 긍휼을 베푼 자가 사마리아 사람이며, 그 사람은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긍휼을 베푸는 것이 천국의 조건입니다.
여러분들은 두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일까?’ 여러분! 그래서 구원이 어려운 것입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그러죠. 우리가. 믿음이 먼저냐? 행함이 먼저냐? ‘닭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천지 창조하실 때, 닭부터 만들었습니다. 닭이 안보이면 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8가지 항목을 생각 할 때, ‘나중에 될 거야!’ NO!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여러분 주변에 얼마든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멀리 가지 않고서도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린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눈을 더 크게 뜨고, 여러분의 주변을 보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여러분! 질병과 물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신적인 고통도 엄청 많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강도 만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긍휼은 행동입니다. 행동이 수반되는 희생입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보고, 막 울고 끝났습니까? ‘아! 정말 불쌍하다!’ ‘아! 가슴 아프다’하고 그냥 지나갑니까? 그것은 제사장입니다. 그것은 레위인입니다. 그것은 긍휼한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반드시 나의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나에게 뭔가의 손실이 따르는 것입니다. 나에게 불이익이 초래되는 것입니다.
성공 지향적인 사람은 천국 가기 힘듭니다. ‘나는 더 잘살아야지’, ‘더 많이 누려야지’, ‘더 많이 올라가야지’, 성공 지향적인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긍휼이 있으면, 성공 지향적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 무슨 성공이 필요합니까?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같이 울고 웃는데 무슨 성공이 필요합니까? 이렇기 때문에, 교회 부흥을 외치는 목사님들 대부분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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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내부를 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바꾸어서, 이제는 타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며 이해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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