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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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배와 그들의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 분을 따랐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6절입니다. ‘그러자’ 여러분 웃기죠. 계속 ‘그러자’가 반복되지요. ‘그러자’는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 때 ‘그러자’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그들의 아버지를 버려두고’ 배는 컸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삯군들이 배에서 일을 하는 것이 나옵니다. ‘세배대의 배’에서 삯군들을 고용합니다. ‘삯군’들을 고용할 정도로 큰 배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의 부활에도 갔었고, 살로메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많이 나오고, 살로메가 많이 나오는데, 이 살로메는 예수님 옆에서 측면으로 물질적인 도움을 많이 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는 출신이 ‘부요’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좀 가난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배 한 척의 값은 굉장히 비싼 편에 속합니다. 게다가 ‘삯군’들을 둘 정도면 부유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배를 버려둔 것입니다. 누가? 야고보와 요한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배를 버린 것입니다.
요한이 어릴 때에 부름 받고 따라갑니다. 요한은 십자가 앞에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요한은 나중에 ‘교회’를 세우고, 또 밧모섬에 귀향해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사도 요한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얻은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한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헌신하고 드리는 삶이 사도 요한의 평생의 삶입니다. 요한은 여기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이름이 나옵니다.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여러분! 신약에서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있는 이름 ‘사도 요한’입니다. 나중에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신기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을 따라다닌 그 예수님을 환상가운데 만난 다는 것, 얼마나 놀라울까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다 잃어버려도, 예수님만은 놓치지 말아야지’,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뭐가 있습니까?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이제까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따랐어요.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그 세례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을 평생 따랐으니, 나중에 뭔가 보상이 있을 거야’, 하고 기대했다면, 여러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막판까지도 십자가를 지시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갈 때, 예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이 아닌,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비용과 손실이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위해 사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살로메가 자기 두 아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자기 아들들에게 한 자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이유는, 그들의 엄마 살로메 마음속에는, 지금 ‘메시야 사상’이 박혀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요한과 야고보가 어머니를 설득할 때, ‘메시야’사상으로 설득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엄마 살로메가 믿는 상태입니다. 아버지도 믿었을까요? 당장은 믿지 않았겠지요. 아버지가 반대 했겠지요. 어떤 사람이 한 명도 아닌 자식 둘을 예수님에게 뺏기고 싶겠습니까? 나중에는 아버지도 믿었을 것입니다. 자! 요한이 먼저 믿은 다음에 형 야고보를 믿게 하고, 엄마를 믿게 하고, 아버지를 믿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그 순간부터 많은 결단과 파장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를 버리다니? 불효자 같으니라구!‘ 아닙니다. 4계명이 5계명 위에 있습니다. 여러분! 5계명은 ’부모 공경‘입니다. 4계명까지는 ’하나님 공경‘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공경하다 보면, ’부모 공경‘을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공경하라‘했습니다. ’주안‘은 무엇이죠. 쉽게 말하면 ’하나님 먼저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립니다. 현재로 봐서는 비참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결국 가족을 구원하게 되었고, 그리고 초대교회 부흥의 주역이 되어서 베드로와 함께 초대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여러분도 ‘사도 요한’의 길을 가지 않겠습니까?
이단 판정받은 교파 가운데 ‘지방교회’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참된 교인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런데는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은 아닙니다. 핍박이 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계속 따라 가십시오!
복음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복음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미혹인 줄 아셔야 합니다. 복음은 내 이익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도 얻고, 세상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많은 손실이 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내 옆에 계시다구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이동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와라’ 나는 예수님을 계속 따라 가야 합니다. 내가 바쁩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놓치는 것이 미혹입니다. 나무가 말라갑니다. 잎사귀도 다 떨어지며 더 이상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고목 나무가 됩니다. 타락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따라간, ‘사도 요한’처럼 끝까지 예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6절입니다. ‘그러자’ 여러분 웃기죠. 계속 ‘그러자’가 반복되지요. ‘그러자’는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 때 ‘그러자’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그들의 아버지를 버려두고’ 배는 컸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삯군들이 배에서 일을 하는 것이 나옵니다. ‘세배대의 배’에서 삯군들을 고용합니다. ‘삯군’들을 고용할 정도로 큰 배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의 부활에도 갔었고, 살로메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많이 나오고, 살로메가 많이 나오는데, 이 살로메는 예수님 옆에서 측면으로 물질적인 도움을 많이 준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는 출신이 ‘부요’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좀 가난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배 한 척의 값은 굉장히 비싼 편에 속합니다. 게다가 ‘삯군’들을 둘 정도면 부유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배를 버려둔 것입니다. 누가? 야고보와 요한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배를 버린 것입니다.
요한이 어릴 때에 부름 받고 따라갑니다. 요한은 십자가 앞에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요한은 나중에 ‘교회’를 세우고, 또 밧모섬에 귀향해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사도 요한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얻은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한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헌신하고 드리는 삶이 사도 요한의 평생의 삶입니다. 요한은 여기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이름이 나옵니다.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여러분! 신약에서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있는 이름 ‘사도 요한’입니다. 나중에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신기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을 따라다닌 그 예수님을 환상가운데 만난 다는 것, 얼마나 놀라울까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다 잃어버려도, 예수님만은 놓치지 말아야지’,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뭐가 있습니까?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이제까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따랐어요.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그 세례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을 평생 따랐으니, 나중에 뭔가 보상이 있을 거야’, 하고 기대했다면, 여러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막판까지도 십자가를 지시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갈 때, 예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이 아닌,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비용과 손실이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위해 사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살로메가 자기 두 아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자기 아들들에게 한 자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이유는, 그들의 엄마 살로메 마음속에는, 지금 ‘메시야 사상’이 박혀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요한과 야고보가 어머니를 설득할 때, ‘메시야’사상으로 설득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엄마 살로메가 믿는 상태입니다. 아버지도 믿었을까요? 당장은 믿지 않았겠지요. 아버지가 반대 했겠지요. 어떤 사람이 한 명도 아닌 자식 둘을 예수님에게 뺏기고 싶겠습니까? 나중에는 아버지도 믿었을 것입니다. 자! 요한이 먼저 믿은 다음에 형 야고보를 믿게 하고, 엄마를 믿게 하고, 아버지를 믿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그 순간부터 많은 결단과 파장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를 버리다니? 불효자 같으니라구!‘ 아닙니다. 4계명이 5계명 위에 있습니다. 여러분! 5계명은 ’부모 공경‘입니다. 4계명까지는 ’하나님 공경‘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공경하다 보면, ’부모 공경‘을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공경하라‘했습니다. ’주안‘은 무엇이죠. 쉽게 말하면 ’하나님 먼저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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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예수님을 따라간, ‘사도 요한’처럼 끝까지 예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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