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 (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28절
- 공유 링크 만들기
- 이메일
- 기타 앱
28. 그 시기에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며, “회개하라.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옵니다.
마태복음 28절입니다. ‘그 시기에’ 그 시기에 라는 것은 다 장성하신 그리스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30살쯤 되었을 때라 생각이 듭니다. ‘그 시기에 세례요한이’ 세례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이라고 쓴 이유는 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자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라고 쓴 것입니다.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구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선지자가 있어야 할 이유는 선지자가 없으면 구원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율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죄에서의 탈출입니다. 레위기는 예배, 참된 예배, 바른 예배입니다. 민수기는 바른 삶입니다. 신명기는 종합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이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있는 상태에서 선지자들을 보낸 이유는 우리는 죄를 지어도 감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율법을 어겨도 감지를 잘 못합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1년 뒤까지 죄를 감지 못했습니다. 머리로 인식하는 죄의 인식이 죄의 감지가 아닙니다. 죄의 감지는 내 영이 철저하게 잘못을 깨닫고 성결의 회개에 이르러야 죄에 대한 정확한 감지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나단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은 다 구원을 위한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부터 말라기까지 선지자들이 필요한 이유는 그 때, 그 때마다 선지자들은 율법을 재조명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의 역할은 율법을 재조명 시켜서 죄에서 벗어나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지자 학교를 하는 미친 교회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성도들이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예언의 은사가 선지자가 아닙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여정에서 믿음을 가졌고 율법대로 산다 할지라도 다시 양심이 무디어져서 죄를 지을 때 지옥에 갈까봐 죄에서 벗어나서 천국으로 보내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보내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으면 자꾸 선지자로 착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지옥에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선지자들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들으려 교회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때에도 백성들은 자꾸만 자기들의 귀에 만족시키는 사람만 찾았습니다. 선지자는 여러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내용을 들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선지자들 중에서 지옥에 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교통이 안 됩니다. 예언의 은사가 미혹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교통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세례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선지자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들어야 할 내용은 선지자를 통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 때문에 구원 받은 것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처럼 지금도 여러분에겐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지은 죄들을 낱낱이 하나님 앞에 사함 받으십시오. 그것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러분에게 와서 죄를 씻게 합니다. 영적으로 세례 요한의 출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죄에서 완벽하게 돌아서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할 떼 우리는 통회가 시작되며 강력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어느 정도 회개가 필요하냐고요? 천국에 들어갈 정도의 완전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천국 가는 길은 회개의 길인데 회개가 완성되면 천국 곧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이 지적한 회개는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회개가 아니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특정 죄에서의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회개합니다. 아니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회개생활을 합니다. 모두 죄에서 돌아섭니다. 여기서 ‘회개하라!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천국의 문턱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즉 상당히 많은 죄에서 돌아섰지만 아직 천국에는 미흡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결정적인 죄로부터의 돌아섬을 말합니다.
왜 선지자 세례요한을 등장시켰냐 하면 율법을 배우고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정도의 회개의 성결이 안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상당히 율법적으로 변화를 받았다 할지라도 천국에는 미흡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등장시킵니다. 세례요한처럼 물질로부터 음란으로부터 자기애로부터 완전한 변화를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을 등장시키며 회개의 메시지로 성경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얼마만큼 회개해야 하나요? 이제 연속되는 말씀은 그런 모든 과정으로 인도합니다. 회개의 종점이 무엇일까요? 앞으로 마태복음 196절까지 계속 진행되어질 내용들은 회개의 상세목록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절은 구원에 임박한 자에게 ‘네가 그동안 많은 영적인 변화를 받았지만, 아직 너는 구원받지 못했어. 네게 완벽한 회개가 필요하며, 그 회개만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열쇠야!’ 라는 말씀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말씀은 회개해야 할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합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8절입니다. ‘그 시기에’ 그 시기에 라는 것은 다 장성하신 그리스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30살쯤 되었을 때라 생각이 듭니다. ‘그 시기에 세례요한이’ 세례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이라고 쓴 이유는 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자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라고 쓴 것입니다.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구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선지자가 있어야 할 이유는 선지자가 없으면 구원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율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죄에서의 탈출입니다. 레위기는 예배, 참된 예배, 바른 예배입니다. 민수기는 바른 삶입니다. 신명기는 종합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이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있는 상태에서 선지자들을 보낸 이유는 우리는 죄를 지어도 감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율법을 어겨도 감지를 잘 못합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1년 뒤까지 죄를 감지 못했습니다. 머리로 인식하는 죄의 인식이 죄의 감지가 아닙니다. 죄의 감지는 내 영이 철저하게 잘못을 깨닫고 성결의 회개에 이르러야 죄에 대한 정확한 감지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나단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은 다 구원을 위한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부터 말라기까지 선지자들이 필요한 이유는 그 때, 그 때마다 선지자들은 율법을 재조명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의 역할은 율법을 재조명 시켜서 죄에서 벗어나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지자 학교를 하는 미친 교회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성도들이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예언의 은사가 선지자가 아닙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여정에서 믿음을 가졌고 율법대로 산다 할지라도 다시 양심이 무디어져서 죄를 지을 때 지옥에 갈까봐 죄에서 벗어나서 천국으로 보내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보내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으면 자꾸 선지자로 착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지옥에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선지자들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들으려 교회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때에도 백성들은 자꾸만 자기들의 귀에 만족시키는 사람만 찾았습니다. 선지자는 여러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내용을 들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선지자들 중에서 지옥에 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교통이 안 됩니다. 예언의 은사가 미혹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교통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세례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선지자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들어야 할 내용은 선지자를 통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 때문에 구원 받은 것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처럼 지금도 여러분에겐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지은 죄들을 낱낱이 하나님 앞에 사함 받으십시오. 그것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러분에게 와서 죄를 씻게 합니다. 영적으로 세례 요한의 출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죄에서 완벽하게 돌아서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할 떼 우리는 통회가 시작되며 강력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어느 정도 회개가 필요하냐고요? 천국에 들어갈 정도의 완전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천국 가는 길은 회개의 길인데 회개가 완성되면 천국 곧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이 지적한 회개는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회개가 아니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특정 죄에서의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회개합니다. 아니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회개생활을 합니다. 모두 죄에서 돌아섭니다. 여기서 ‘회개하라!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천국의 문턱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즉 상당히 많은 죄에서 돌아섰지만 아직 천국에는 미흡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결정적인 죄로부터의 돌아섬을 말합니다.
왜 선지자 세례요한을 등장시켰냐 하면 율법을 배우고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정도의 회개의 성결이 안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상당히 율법적으로 변화를 받았다 할지라도 천국에는 미흡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등장시킵니다. 세례요한처럼 물질로부터 음란으로부터 자기애로부터 완전한 변화를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을 등장시키며 회개의 메시지로 성경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얼마만큼 회개해야 하나요? 이제 연속되는 말씀은 그런 모든 과정으로 인도합니다. 회개의 종점이 무엇일까요? 앞으로 마태복음 196절까지 계속 진행되어질 내용들은 회개의 상세목록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절은 구원에 임박한 자에게 ‘네가 그동안 많은 영적인 변화를 받았지만, 아직 너는 구원받지 못했어. 네게 완벽한 회개가 필요하며, 그 회개만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열쇠야!’ 라는 말씀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말씀은 회개해야 할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51절
51.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나라와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라고 말하며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1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유대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유대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갈릴리 호수 좌편이 납달리고, 납달리 바로 아래 지역이 스불론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인접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이방의 갈릴리, 지금 여기서 갈릴리를 이방이라 부릅니다. 누가? ‘이사야’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이방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범죄할 때, 그들을 쫓아내시고, 여전히 구전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 되는데, 아벨은 대표적인 사람이죠. 제사를 드린 사람이고,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어지는데, 그 때는 1,000살을 한계로 해서 900세 이상을 다 산 사람들이죠. 근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자꾸 줄어 드는 것이예요. 사람 숫자는 늘어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심지어 노아 때에 와서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방법을 쓰셨는데, 노아 가족만 남겨두고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일어 납니다. 노아 가족만 살아남고 전 지구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만
마태복음 1장(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6절
6. 그런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가 모두 14세대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까지 14세대이며, 바벨론 이주부터 그리스도까지 14세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절입니다. 이 14세대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이 그리스도를 묘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메시아 통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윗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죠.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올거야! 나중에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누군가가 올거야! 나중에 어떤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를 다스리는데, 우리는 꿈같은 삶을 살거야' 하고 구약 내내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 하셨을 때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죠. 이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왕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잘 통치해 잘 먹고 잘 살거야! 우리는 행복할 거야!'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오면, 정치적으로 왕이 되어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는 한 자리 할거야!' 그래서 다툼도 일어납니다. 자기들끼리 '자. 너는 오른편에 앉아 왼편에 앉아!'라고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한 그 이해와 사고가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다음에 모든 수난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시고 부활 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체로써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10일 뒤에 승천하시고 10일 뒤에 오순절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106절
106.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마태복음 106절 말씀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맞지요. 눈이 감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당연히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여러분! 깜깜한 밤에 횃불이 있으면 그 불 때문에 밤이 환하게 밝은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을 보게 되고 눈이 감긴 소경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 그렇죠. 눈이 멀쩡하면 밝음을 느낍니다. 왜? 태양광선을 통해서 사물을 볼 수 있으니까, 밝음을 느낍니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눈이 좋지 않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여러분! 눈만 감으면 어두움입니다. 눈만 뜨면 밝음이고, 이 눈이라는 조그마한 기관 때문에 우리 온몸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것은 육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데, 왜? 영의 세계이냐? 표현할 때, 네 눈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의 눈'이 아니고 '영의 눈'입니다. 동시에 '성하다'는 표현은 '영, 육'에 같이 쓰이는 표현인데, 이 '악하다'는 표현은 영에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구절을 이해하실 때, '아! 이 구절은 영적인 것이구나!'하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 '영의 눈'이 감긴 상태,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감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믿는 자의 악이 어디서 들어올까요? 영의 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영의 눈이 닫힌 상태, 뭐가 들어올까요?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영의 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