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8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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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80절
80. 그런즉 만약 너의 예물을 제단에 가져오는데, 네 형제가 네게 적대적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거기서 기억난다면, 너의 예물을 제단 앞에 버려둬라. 그리고 가라. 먼저 너의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그때 와서 너의 예물을 바쳐라.
마태복음 80절 말씀입니다.
'그런즉'은 이웃 관계에서 다투거나 싸울 때, 욕설이나, 상대방의 인격 모독이라든가, 화를 내는 그런 것입니다.
'만약 너의 예물을'
내용이 반전되는데, 79절까지는 지옥 가는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예물'하면, 구약에서는 산비둘기나, 염소나, 수양이나, 송아지 등을 예물로 드리지요. '예물',하면 '아! 예배구나!' 하고 연상하면 됩니다. 성경에서의 예배의 핵심은 '예물'에 있습니다.
십일조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증거에 해당합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안 하십니까? 구원을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는데, 그것은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자연히 십일조를 드리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안 생깁니까?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가를 의심해야 합니다. 곧 구원을 의심하십시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시간에 어떤 노래를 부를까?' 탈락입니다. '어떤 말씀을 들을까?' 탈락입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까?'가 됩니다. 그것이 자연적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십일조의 거부 반응'은, 구원에서 이탈되어서 지옥으로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십일조 거부 반응이 있는 것이지, 정말로 구원을 받았다면,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0분의 1을 드렸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본체가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구원을 받는 자들은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물'은 '아! 구원 받은 자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물을 제단에'
'제단에'는, '교회 처소'를 말합니다. '예배드리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 장소가 '유형 교회'이건, '사이버 교회'이건, '길거리 예배'를 드리는 곳이건 관계없이, '제단'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며, '제단'은 예수그리스도가 받는 예배를 말합니다.
'제단에 가져오는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네 형제가 네게 적대적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억난다면'
상황이 비슷합니다. 개역개정에는 '네 형제가 적대적인 것'을 '원망 들을 일'이라고 했는데, '거스리는'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형제랑 싸운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랑 싸우면 어떻게 되죠? 형제가 '아우~ 씨이!' 하면서, 속으로 욕을 하죠! '아니! 저 놈이 나랑 싸우고서 예배하러 가고 있네!' 그러는 것입니다.
'기억난다면'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침에 싸운 것입니다. 집 사람이 늦게 일어난다고 '왜 늦어!' 그러면서 교회를 가다가 싸우기도 하고, 또는 돈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고 하니까 싸우기도 하고, 싸움과 다툼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싸움 안 한 사람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람 있습니다. 자기들은 부부싸움 안 한다고, 그러면 '위험'한 것입니다. 왜? 싸움을 안 한다는 얘기는 포기를 말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포기'예요. 어떻게 싸움을 안 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싸웁니다. 싸우다가 언쟁이 날 수도 있죠. 그런데 뭐가 다르냐?
천국 가는 사람들의 싸움은 지옥 가는 사람들과 상당히 다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의 싸움은, 싸울 때,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리고, 폭언을 하고 하는데, 천국 가는 사람들의 싸움은 그냥 일반적인 말싸움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싸울 때도, 좀 점잖게 싸웁니다.
사도 바울도 싸웠지요. 사도바울이 1차 여행에서 바나바와 마가랑 셋이서 동행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도망쳤습니다. 여러분!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는데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마가도 우리랑 비교가 안 됩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성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같이 선교 여행을 갔는데, 마가가 간밤에 도망을 친 것입니다. 얼마나 사도바울이 열 받겠습니까?
바나바와 둘이서 1차 여행을 끝낸 다음에, 다시 바나바랑 2차를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워낙에 열을 받아서 물론 욕설을 하지 않았겠지만, '마가'는 못 데려 간다고 거절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심하게 다투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말이죠! 이렇게 순화시킨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굉장히 바나바랑 심하게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고, 바울은 2차 여행에 실라를 데리고 갑니다.
'너의 예물을 제단 앞에 버려둬라'
이것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제단 앞에, 다시 말하면 '예배를 드리기 전'입니다. 구약에서 성막 모형에서 '청동 제단'이 있습니다. 청동제단이 얼마나 크냐하면,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엄청 큰 제단입니다. 거기서 소제와 화목제와 번제와 그리고 속건죄와 그리고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청동 제단' 곧 '번제단'에서도, 5대 제사를 드렸고, 지금 신약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라'
어디로 갑니까? '먼저 너희 형제와 화해하라' 이것이 '오늘의 본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본론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 중요한 제사입니다. 더 중요한 제사는 '이웃과 화평한 제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론을 말씀하시는데, '너희가 나에게 와서 예배를 드리느냐? 내가 중요한 예배를 알려줄께! 제발 이웃과 싸우지 좀 마! 이웃과 화평한 제사보다 저 중요한 제사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라 할 찌라도 다툴 수가 있습니다. 필연적인 것입니다. 때로는 화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는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제사는 어떤 제사이냐?'하면, '먼저 이웃과 화평한 제사'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보니까, '너희가 산 제사를 드려라!' 그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의 내용'들이 연이어 나옵니다. 제사가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제사'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삶의 제사'가 있는데, 이웃과의 좋은 관계, 싸우지 않는 것,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고, 다투지 않는 상태, 이것이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임을 여러분이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화해하라는 것은, '좋은 관계를 유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예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처소에 와서, '예수님! 나 예수님 사모해요! 예수님! 정말 예수님 보고 싶었어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 안하셔도 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십니다.
'양과 염소 비유' 말씀 아시죠? 염소가,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섬겼는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옥을 말씀하시지요?' 왜냐면 염소들은 꼭 예배에서만 하나님을 찾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삶에서는 자기 형제들을 핍박하고, 다투고, 싸우고, 심지어 욕설을 하고, 모독을 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는 예배는 무엇이냐?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그 때 와서 너의 예물을 바쳐라!'
이것은, '네가 화해하고 오면? 내가 종교적인 예배를 받아 줄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삶에서 실패하면, 하나님이 예배를 안 받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무리 예배를 진지하게 드려도, 삶에서 형제를 미워하고, 다투고, 화내고, 이러면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더 나아가, 남에게 폭언하고 욕설하면, 이것은 지옥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엇을 드려도 기도가 잘 안됩니다. 여러분! 남과 사이가 안 좋은데 기도가 잘 됩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십일조도 원한다!' 하지만, 너희에게 더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섬김의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권세자에게 복종하라!' '네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에게 순종하라!'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제자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잘 받으라!' '백성은 국가의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라!'
여러분! 살면서 군림하지 마십시오! 어떤 큰 목사님이 외국에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주 좋은 차에서 내립니다. 아주 넓은 주차장이었는데, 그 목사님이 차에서 내릴 때, 그 목사님을 마중 나온 부목사님들 30명 정도가 양쪽에 줄을 길게 서서 '90도'로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조폭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여러분!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큰 교회 목사가 되면 그렇게 군림해도 됩니까? 저는 그런 분들을 '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집회 좀 다닌다고 남 앞에서 우쭐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왜 섬김이 없습니까? 왜냐구요? 섬김은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사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길게 줄 서서 인사하는 부목사들이나, 거기에 맞장구 쳐서, '잘 지냈냐?' 반응하는 목사나, 똑같습니다. 여러분! 집에서나 그렇게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부인에게 그렇게 해 보십시오! 왜? 교회 목사한테는 90도로 인사하고 집에 가서 부인하고 애들한테는 군림하려고 합니까? 그렇게 미친 놈들 많습니다.
옆에 사람들에게는 '뭐 가지고 와!', '뭐 뭐 준비해!'하면서, 종교적인 곳에 가면,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 우리 목사님 최고야!' 미쳤습니다. 그렇게 안 해도 됩니다. 종교에 하나님이 더 가산점을 주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작은 곳에서 내가 섬겨야 하는데, 작은 데서는 군림하고, 종교적인 곳에 가서는 엎드립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은 10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섬기는 것, 90점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10분의 1'을 드립니다. 나머지는 누구를 드립니까? '10분의 9'는 이웃에게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도 바쳐야조. '10분의 1'입니다. '10분의 9'는 '구제하고, 부양하고, 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써라!'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예배의 진정한 성공은 삶의 예배에서의 성공에 달려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80절 말씀입니다.
'그런즉'은 이웃 관계에서 다투거나 싸울 때, 욕설이나, 상대방의 인격 모독이라든가, 화를 내는 그런 것입니다.
'만약 너의 예물을'
내용이 반전되는데, 79절까지는 지옥 가는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예물'하면, 구약에서는 산비둘기나, 염소나, 수양이나, 송아지 등을 예물로 드리지요. '예물',하면 '아! 예배구나!' 하고 연상하면 됩니다. 성경에서의 예배의 핵심은 '예물'에 있습니다.
십일조는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증거에 해당합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안 하십니까? 구원을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는데, 그것은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게 되면, 자연히 십일조를 드리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안 생깁니까?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가를 의심해야 합니다. 곧 구원을 의심하십시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시간에 어떤 노래를 부를까?' 탈락입니다. '어떤 말씀을 들을까?' 탈락입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까?'가 됩니다. 그것이 자연적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십일조의 거부 반응'은, 구원에서 이탈되어서 지옥으로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십일조 거부 반응이 있는 것이지, 정말로 구원을 받았다면,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10분의 1을 드렸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본체가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구원을 받는 자들은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물'은 '아! 구원 받은 자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물을 제단에'
'제단에'는, '교회 처소'를 말합니다. '예배드리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 장소가 '유형 교회'이건, '사이버 교회'이건, '길거리 예배'를 드리는 곳이건 관계없이, '제단'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며, '제단'은 예수그리스도가 받는 예배를 말합니다.
'제단에 가져오는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네 형제가 네게 적대적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억난다면'
상황이 비슷합니다. 개역개정에는 '네 형제가 적대적인 것'을 '원망 들을 일'이라고 했는데, '거스리는'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형제랑 싸운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랑 싸우면 어떻게 되죠? 형제가 '아우~ 씨이!' 하면서, 속으로 욕을 하죠! '아니! 저 놈이 나랑 싸우고서 예배하러 가고 있네!' 그러는 것입니다.
'기억난다면'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침에 싸운 것입니다. 집 사람이 늦게 일어난다고 '왜 늦어!' 그러면서 교회를 가다가 싸우기도 하고, 또는 돈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고 하니까 싸우기도 하고, 싸움과 다툼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싸움 안 한 사람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람 있습니다. 자기들은 부부싸움 안 한다고, 그러면 '위험'한 것입니다. 왜? 싸움을 안 한다는 얘기는 포기를 말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포기'예요. 어떻게 싸움을 안 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싸웁니다. 싸우다가 언쟁이 날 수도 있죠. 그런데 뭐가 다르냐?
천국 가는 사람들의 싸움은 지옥 가는 사람들과 상당히 다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의 싸움은, 싸울 때,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리고, 폭언을 하고 하는데, 천국 가는 사람들의 싸움은 그냥 일반적인 말싸움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싸울 때도, 좀 점잖게 싸웁니다.
사도 바울도 싸웠지요. 사도바울이 1차 여행에서 바나바와 마가랑 셋이서 동행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도망쳤습니다. 여러분!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는데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마가도 우리랑 비교가 안 됩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성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같이 선교 여행을 갔는데, 마가가 간밤에 도망을 친 것입니다. 얼마나 사도바울이 열 받겠습니까?
바나바와 둘이서 1차 여행을 끝낸 다음에, 다시 바나바랑 2차를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워낙에 열을 받아서 물론 욕설을 하지 않았겠지만, '마가'는 못 데려 간다고 거절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심하게 다투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말이죠! 이렇게 순화시킨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굉장히 바나바랑 심하게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고, 바울은 2차 여행에 실라를 데리고 갑니다.
'너의 예물을 제단 앞에 버려둬라'
이것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제단 앞에, 다시 말하면 '예배를 드리기 전'입니다. 구약에서 성막 모형에서 '청동 제단'이 있습니다. 청동제단이 얼마나 크냐하면,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엄청 큰 제단입니다. 거기서 소제와 화목제와 번제와 그리고 속건죄와 그리고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청동 제단' 곧 '번제단'에서도, 5대 제사를 드렸고, 지금 신약에서도 우리는 예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라'
어디로 갑니까? '먼저 너희 형제와 화해하라' 이것이 '오늘의 본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본론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 중요한 제사입니다. 더 중요한 제사는 '이웃과 화평한 제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론을 말씀하시는데, '너희가 나에게 와서 예배를 드리느냐? 내가 중요한 예배를 알려줄께! 제발 이웃과 싸우지 좀 마! 이웃과 화평한 제사보다 저 중요한 제사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라 할 찌라도 다툴 수가 있습니다. 필연적인 것입니다. 때로는 화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는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제사는 어떤 제사이냐?'하면, '먼저 이웃과 화평한 제사'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보니까, '너희가 산 제사를 드려라!' 그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의 내용'들이 연이어 나옵니다. 제사가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제사'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삶의 제사'가 있는데, 이웃과의 좋은 관계, 싸우지 않는 것,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고, 다투지 않는 상태, 이것이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임을 여러분이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화해하라는 것은, '좋은 관계를 유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예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처소에 와서, '예수님! 나 예수님 사모해요! 예수님! 정말 예수님 보고 싶었어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 안하셔도 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십니다.
'양과 염소 비유' 말씀 아시죠? 염소가,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섬겼는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옥을 말씀하시지요?' 왜냐면 염소들은 꼭 예배에서만 하나님을 찾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삶에서는 자기 형제들을 핍박하고, 다투고, 싸우고, 심지어 욕설을 하고, 모독을 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는 예배는 무엇이냐?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그 때 와서 너의 예물을 바쳐라!'
이것은, '네가 화해하고 오면? 내가 종교적인 예배를 받아 줄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삶에서 실패하면, 하나님이 예배를 안 받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무리 예배를 진지하게 드려도, 삶에서 형제를 미워하고, 다투고, 화내고, 이러면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더 나아가, 남에게 폭언하고 욕설하면, 이것은 지옥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엇을 드려도 기도가 잘 안됩니다. 여러분! 남과 사이가 안 좋은데 기도가 잘 됩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십일조도 원한다!' 하지만, 너희에게 더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섬김의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권세자에게 복종하라!' '네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에게 순종하라!'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제자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잘 받으라!' '백성은 국가의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라!'
여러분! 살면서 군림하지 마십시오! 어떤 큰 목사님이 외국에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주 좋은 차에서 내립니다. 아주 넓은 주차장이었는데, 그 목사님이 차에서 내릴 때, 그 목사님을 마중 나온 부목사님들 30명 정도가 양쪽에 줄을 길게 서서 '90도'로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조폭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여러분! 그런 것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큰 교회 목사가 되면 그렇게 군림해도 됩니까? 저는 그런 분들을 '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집회 좀 다닌다고 남 앞에서 우쭐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왜 섬김이 없습니까? 왜냐구요? 섬김은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사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길게 줄 서서 인사하는 부목사들이나, 거기에 맞장구 쳐서, '잘 지냈냐?' 반응하는 목사나, 똑같습니다. 여러분! 집에서나 그렇게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부인에게 그렇게 해 보십시오! 왜? 교회 목사한테는 90도로 인사하고 집에 가서 부인하고 애들한테는 군림하려고 합니까? 그렇게 미친 놈들 많습니다.
옆에 사람들에게는 '뭐 가지고 와!', '뭐 뭐 준비해!'하면서, 종교적인 곳에 가면,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 우리 목사님 최고야!' 미쳤습니다. 그렇게 안 해도 됩니다. 종교에 하나님이 더 가산점을 주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작은 곳에서 내가 섬겨야 하는데, 작은 데서는 군림하고, 종교적인 곳에 가서는 엎드립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은 10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섬기는 것, 90점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10분의 1'을 드립니다. 나머지는 누구를 드립니까? '10분의 9'는 이웃에게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도 바쳐야조. '10분의 1'입니다. '10분의 9'는 '구제하고, 부양하고, 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써라!'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예배의 진정한 성공은 삶의 예배에서의 성공에 달려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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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나라와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라고 말하며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1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유대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유대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갈릴리 호수 좌편이 납달리고, 납달리 바로 아래 지역이 스불론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인접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이방의 갈릴리, 지금 여기서 갈릴리를 이방이라 부릅니다. 누가? ‘이사야’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이방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범죄할 때, 그들을 쫓아내시고, 여전히 구전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 되는데, 아벨은 대표적인 사람이죠. 제사를 드린 사람이고,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어지는데, 그 때는 1,000살을 한계로 해서 900세 이상을 다 산 사람들이죠. 근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자꾸 줄어 드는 것이예요. 사람 숫자는 늘어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심지어 노아 때에 와서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방법을 쓰셨는데, 노아 가족만 남겨두고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일어 납니다. 노아 가족만 살아남고 전 지구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만
마태복음 1장(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6절
6. 그런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가 모두 14세대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까지 14세대이며, 바벨론 이주부터 그리스도까지 14세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절입니다. 이 14세대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이 그리스도를 묘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메시아 통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윗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죠.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올거야! 나중에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누군가가 올거야! 나중에 어떤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를 다스리는데, 우리는 꿈같은 삶을 살거야' 하고 구약 내내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 하셨을 때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죠. 이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왕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잘 통치해 잘 먹고 잘 살거야! 우리는 행복할 거야!'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오면, 정치적으로 왕이 되어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는 한 자리 할거야!' 그래서 다툼도 일어납니다. 자기들끼리 '자. 너는 오른편에 앉아 왼편에 앉아!'라고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한 그 이해와 사고가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다음에 모든 수난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시고 부활 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체로써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10일 뒤에 승천하시고 10일 뒤에 오순절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106절
106.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마태복음 106절 말씀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맞지요. 눈이 감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당연히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여러분! 깜깜한 밤에 횃불이 있으면 그 불 때문에 밤이 환하게 밝은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을 보게 되고 눈이 감긴 소경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 그렇죠. 눈이 멀쩡하면 밝음을 느낍니다. 왜? 태양광선을 통해서 사물을 볼 수 있으니까, 밝음을 느낍니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눈이 좋지 않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여러분! 눈만 감으면 어두움입니다. 눈만 뜨면 밝음이고, 이 눈이라는 조그마한 기관 때문에 우리 온몸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것은 육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데, 왜? 영의 세계이냐? 표현할 때, 네 눈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의 눈'이 아니고 '영의 눈'입니다. 동시에 '성하다'는 표현은 '영, 육'에 같이 쓰이는 표현인데, 이 '악하다'는 표현은 영에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구절을 이해하실 때, '아! 이 구절은 영적인 것이구나!'하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 '영의 눈'이 감긴 상태,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감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믿는 자의 악이 어디서 들어올까요? 영의 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영의 눈이 닫힌 상태, 뭐가 들어올까요?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영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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