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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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89절
89. '눈에 대하여는 눈, 이에 대하여는 이' 라고 선포되었다고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것을 너희에게 말한다. 반대로 네 오른쪽 뺨을 치는 자에게는 그에게 반대쪽도 돌려대라. 네게 소송걸어 네 속옷을 받기를 원하는 자, 그에게는 겉옷도 허용하라. 네게 1마일을 강요하는 자에게는 그와 함께 2마일을 가라.
마태복음 89절 말씀입니다.
" '눈에 대하여는 눈, 이에 대하여는 이'라고 선포되었다고 너희가 들었다" 구약에 있는 말씀이죠. 배상 책임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눈'만큼의 손해를 주었느냐? '눈'정도의 배상을 하라. 너희가 '이'정도의 손해를 주었느냐? '이' 정도의 배상을 하라. 배상 책임의 율법의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비슷한 내용의 말씀들이 '함무라이 법전'이라고 최초의 성문법에 나와 있지요. 법은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면, 그 만큼의 배상을 하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법정 이자가 20%가 되어 있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5%에서만 법적 판정이 나와 있습니다. 손해를 끼쳤을 때, 연 5%의 이자, 시간적 손해가 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것을 너희에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손해를 끼쳤을 때의 입장이 아니고, 손해를 입을 때의 입장입니다. 손해를 끼쳤을 때는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 당연히 보상을 해주는 말씀이 적용되는 것이고, 반대로 손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누구에게 입습니까? 악한 자에게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악한 자만 안 만나도, 정말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악한 자를 만나지 않아도, '대 성공'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남편 잘못 만나서', '아내 잘못 만나서', '부모 잘 못 만나서', '자녀 잘못 만나서', 인생이 꼬이고 엮이고, 인생이 패가망신 하는 것이지 악한 자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 당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악한 자를 멀리해야 하며, 악한 자에 다가섬에 여러분은 '나는 괜찮아!' '아닙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맹수가 오면 끝장입니다. 여러분! 맹수가 달려드는데, 손해를 안 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맹수가 달려들면 숨통은 끊지 않아도, 여러분의 팔이라도 짤라 버립니다. 맹수들, 사자, 호랑이, 개, 늑대, 이리, 많은 맹수들이, 이 세상에는 널려 있습니다. 세상에 악한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들이 '악한 자'라고 알고 있겠습니까? 모릅니다. 여러분! '악한 자'가 '난! 악한 자야!' 이렇게 말합니까? 없습니다. '악한 자'는 그 안에 '악한 영'이 강하게 함유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것을 말한다"
참 이것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가 손해를 봤는데, '피해자'이죠. 우리가 피해야 하는데, 미쳐 못 피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악한 자'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고 들어오는데, 이미 들어오면 우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것까지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대적을 하면 안됩니다.
대적이 무엇이냐 하면, '너! 나한테 이렇게 피해를 주었어! 어디 두고 보자! 너! 그럴 수 있어?' 하고, 보복하는 것입니다. 앙갚음을 갖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 입는 것', 이것이 대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악함을 용서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하나님 앞에 '악한 자'입니다. 구도가 나보다 더 악한 자에게는 내가 '피해자'이지만, 우리도 하나님 앞에는 '악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대적해서 들어올 때, 그에 대해 우리는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정말 '무고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자기 장인입니다. 다윗이 인기가 많으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생의 큰 손해입니까? 여러분! 1년도 아니고, 10년을 쫓아 다닙니다. 여러분! 그 마음 아십니까? '날 죽이려고 하는 그 마음', 사울입니다. 다윗은 그것에 대해서 대적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사울을 죽일 3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맞서서 죽이려고 하면, 당연히 죽여야죠. 죽이려고 오는데 죽이지 않고, 다 용서해 줍니다. 얼마 동안?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사울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나중에 자기 아들이 반역을 합니다. 세상에! '자기 아들'이 반역합니다.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옵니다. 얼마나 다윗이 힘들었을까요? 사울이야 '장인'이었지만, 이번엔 '아들'이 또 그럽니다. 다윗은 의로운 사람이지요.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다니며, 그를 용서하지요. 물론 압살롬은 나중에 죽게 됩니다. 그때도 역시 다윗의 마음은 아픕니다. 다윗은 대적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블레셋이 우물을 빼앗았는데, 대적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물을 버리고 이사 갑니다. 계속 빼앗으니까 2번 이사 갑니다. 3번째에서 이삭이 100배의 축복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만나는 것은 참 골치 아픕니다. 아예 안 만나야 하는데, 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대적하지 말까요? '반대로' 대적하지 말고 '네 오른쪽 뺨을 치는 자에게는 그에게 반대쪽도 돌려대라' 우리 한글개정에는 왼편으로 되어 있지만, 원어는 왼편이 아닙니다. 원어에는 반대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뺨을 치는 자에게 뭐합니까? '왼편도 돌려대라!'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악한 자에게의 '신체적인 손상'을 말합니다. 악한 자는 어떻게 합니까? 멱살을 잡고 때립니다.
여러분! 악한 자의 특징은, '악한 자'는 악에 차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에게 육체적인, 물리적인 힘을 가합니다. 그 때, 맞을 때, 우리는 당연히 '때렸어?'하고 같이 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적하지 말고, '반대쪽도 돌려대라!' 이것은 신체적인 악한 자의 공격을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가 우리의 신체적인 상해를 가할 때, 그냥 가만히 참고 인내하며,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 다음 공격이 무엇입니까? '네게 소송을 걸어' 이것 또 골치 아픕니다. 직전에는 물리적으로 때렸는데 이것은 '소송을 거는 것'입니다. 세상에 '별의 별' 일이 다 많지요. 정말입니다. '소송 걸어 네 속옷을' 속옷은 금액이 얼마 안 나갑니다. '받기를 원하는 자, 그에게 겉옷도 허용하라' 이것은 뭡니까? 겉옷은 비쌉니다. 옛날 금액으로 치면 속옷은, 현재 금액 20~30만원 사이입니다. 옛날에는 겉옷이 상당히 비쌌습니다. 천년 전에도 겉옷은 '3백에서 5백'을 주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우리는 손해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손해를 당하라!' 이것입니다. 크리스쳔들이여! 크리스쳔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를 당하면 당하십시오! 허용하십시오! 물질적인 손해를 당할 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냥 받아 주십시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맨날 손해만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그냥 손해 보고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네게 1마일을 강요하는 자에게는 그와 함께 2마일을 가라' 1마일은 무엇입니까? 2km정도 됩니다. 2마일은 30분정도의 거리가 되는 것이죠. 뭐! 쉬운 것은 아닙니다. 뭡니까? '강요' 여러분! 악한 자가 우리를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강요를 많이 하지요. 우리는 '강요'앞에, '강요'를 그냥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크리스쳔이 '안 믿는 자'를 향해서, 손해를 끼치면 반드시 보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악한 자'가 우리를 향해서 강요할 때,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냥 강요에 따라 주십시오.
여러분!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똑같이 강요하고', '똑같이 거절하면'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는 사람이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산상수훈은 지옥가는 사람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 산상수훈을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실 확률이 큰 것입니다. 우린 맨 정신으로는 못 받아 들입니다. 어떻게 강요를 받아줍니까?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악한 자가 우리에게 강요할 때, '그래!' 하고, 악한 자를 받아 주는 마음, 여러분! 이럴 때, '악한 자'가 변화가 됩니다. 전도는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때, 그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놀람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행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선택 받은 사람'만 이 말씀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선택받은 사람만 곧 예정된 사람만 이 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행함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체적인 악한 자의 공격이 있습니까? 그냥 받아 주십시오. 안 죽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입혀 옵니까? 여러분! 다 배상해 주십시오. 여러분! 안 굶어 죽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강요가 들어옵니까? 그냥 따라 주십시오! 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더 건강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더 큰 물질적인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더 큰 우리의 삶의 여유를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공급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면서, '역시 내 아들이야!'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고, '아이구! 마귀자녀랑 똑같네!' 그런 말 듣고 싶습니까?
복은 예수님 말씀대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미혹되지 마십시오. 모든 '번영신학', '소원성취', 이런 것들은 대부분 마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저 하늘 나라에만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 모든 것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불하고, '손해'를 지불하고, '희생'을 지불하고, 지불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델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영화'를 꿈꾸지 마십시오! 살면서 '축복'을 꿈꾸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미혹'입니다. '눈에 대해서는 눈', '보복하는 것', 주님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손해를 입었을 때는, 그냥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89절 말씀입니다.
" '눈에 대하여는 눈, 이에 대하여는 이'라고 선포되었다고 너희가 들었다" 구약에 있는 말씀이죠. 배상 책임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눈'만큼의 손해를 주었느냐? '눈'정도의 배상을 하라. 너희가 '이'정도의 손해를 주었느냐? '이' 정도의 배상을 하라. 배상 책임의 율법의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비슷한 내용의 말씀들이 '함무라이 법전'이라고 최초의 성문법에 나와 있지요. 법은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면, 그 만큼의 배상을 하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법정 이자가 20%가 되어 있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5%에서만 법적 판정이 나와 있습니다. 손해를 끼쳤을 때, 연 5%의 이자, 시간적 손해가 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것을 너희에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손해를 끼쳤을 때의 입장이 아니고, 손해를 입을 때의 입장입니다. 손해를 끼쳤을 때는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 당연히 보상을 해주는 말씀이 적용되는 것이고, 반대로 손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누구에게 입습니까? 악한 자에게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악한 자만 안 만나도, 정말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악한 자를 만나지 않아도, '대 성공'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남편 잘못 만나서', '아내 잘못 만나서', '부모 잘 못 만나서', '자녀 잘못 만나서', 인생이 꼬이고 엮이고, 인생이 패가망신 하는 것이지 악한 자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 당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악한 자를 멀리해야 하며, 악한 자에 다가섬에 여러분은 '나는 괜찮아!' '아닙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맹수가 오면 끝장입니다. 여러분! 맹수가 달려드는데, 손해를 안 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맹수가 달려들면 숨통은 끊지 않아도, 여러분의 팔이라도 짤라 버립니다. 맹수들, 사자, 호랑이, 개, 늑대, 이리, 많은 맹수들이, 이 세상에는 널려 있습니다. 세상에 악한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들이 '악한 자'라고 알고 있겠습니까? 모릅니다. 여러분! '악한 자'가 '난! 악한 자야!' 이렇게 말합니까? 없습니다. '악한 자'는 그 안에 '악한 영'이 강하게 함유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것을 말한다"
참 이것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가 손해를 봤는데, '피해자'이죠. 우리가 피해야 하는데, 미쳐 못 피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악한 자'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고 들어오는데, 이미 들어오면 우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것까지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대적을 하면 안됩니다.
대적이 무엇이냐 하면, '너! 나한테 이렇게 피해를 주었어! 어디 두고 보자! 너! 그럴 수 있어?' 하고, 보복하는 것입니다. 앙갚음을 갖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 입는 것', 이것이 대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악함을 용서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하나님 앞에 '악한 자'입니다. 구도가 나보다 더 악한 자에게는 내가 '피해자'이지만, 우리도 하나님 앞에는 '악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대적해서 들어올 때, 그에 대해 우리는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정말 '무고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자기 장인입니다. 다윗이 인기가 많으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생의 큰 손해입니까? 여러분! 1년도 아니고, 10년을 쫓아 다닙니다. 여러분! 그 마음 아십니까? '날 죽이려고 하는 그 마음', 사울입니다. 다윗은 그것에 대해서 대적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사울을 죽일 3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맞서서 죽이려고 하면, 당연히 죽여야죠. 죽이려고 오는데 죽이지 않고, 다 용서해 줍니다. 얼마 동안?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사울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나중에 자기 아들이 반역을 합니다. 세상에! '자기 아들'이 반역합니다.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옵니다. 얼마나 다윗이 힘들었을까요? 사울이야 '장인'이었지만, 이번엔 '아들'이 또 그럽니다. 다윗은 의로운 사람이지요.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다니며, 그를 용서하지요. 물론 압살롬은 나중에 죽게 됩니다. 그때도 역시 다윗의 마음은 아픕니다. 다윗은 대적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블레셋이 우물을 빼앗았는데, 대적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물을 버리고 이사 갑니다. 계속 빼앗으니까 2번 이사 갑니다. 3번째에서 이삭이 100배의 축복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만나는 것은 참 골치 아픕니다. 아예 안 만나야 하는데, 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대적하지 말까요? '반대로' 대적하지 말고 '네 오른쪽 뺨을 치는 자에게는 그에게 반대쪽도 돌려대라' 우리 한글개정에는 왼편으로 되어 있지만, 원어는 왼편이 아닙니다. 원어에는 반대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뺨을 치는 자에게 뭐합니까? '왼편도 돌려대라!'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악한 자에게의 '신체적인 손상'을 말합니다. 악한 자는 어떻게 합니까? 멱살을 잡고 때립니다.
여러분! 악한 자의 특징은, '악한 자'는 악에 차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에게 육체적인, 물리적인 힘을 가합니다. 그 때, 맞을 때, 우리는 당연히 '때렸어?'하고 같이 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적하지 말고, '반대쪽도 돌려대라!' 이것은 신체적인 악한 자의 공격을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가 우리의 신체적인 상해를 가할 때, 그냥 가만히 참고 인내하며,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 다음 공격이 무엇입니까? '네게 소송을 걸어' 이것 또 골치 아픕니다. 직전에는 물리적으로 때렸는데 이것은 '소송을 거는 것'입니다. 세상에 '별의 별' 일이 다 많지요. 정말입니다. '소송 걸어 네 속옷을' 속옷은 금액이 얼마 안 나갑니다. '받기를 원하는 자, 그에게 겉옷도 허용하라' 이것은 뭡니까? 겉옷은 비쌉니다. 옛날 금액으로 치면 속옷은, 현재 금액 20~30만원 사이입니다. 옛날에는 겉옷이 상당히 비쌌습니다. 천년 전에도 겉옷은 '3백에서 5백'을 주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우리는 손해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손해를 당하라!' 이것입니다. 크리스쳔들이여! 크리스쳔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를 당하면 당하십시오! 허용하십시오! 물질적인 손해를 당할 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냥 받아 주십시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맨날 손해만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그냥 손해 보고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네게 1마일을 강요하는 자에게는 그와 함께 2마일을 가라' 1마일은 무엇입니까? 2km정도 됩니다. 2마일은 30분정도의 거리가 되는 것이죠. 뭐! 쉬운 것은 아닙니다. 뭡니까? '강요' 여러분! 악한 자가 우리를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강요를 많이 하지요. 우리는 '강요'앞에, '강요'를 그냥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크리스쳔이 '안 믿는 자'를 향해서, 손해를 끼치면 반드시 보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악한 자'가 우리를 향해서 강요할 때,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냥 강요에 따라 주십시오.
여러분!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똑같이 강요하고', '똑같이 거절하면'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는 사람이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산상수훈은 지옥가는 사람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 산상수훈을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실 확률이 큰 것입니다. 우린 맨 정신으로는 못 받아 들입니다. 어떻게 강요를 받아줍니까?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악한 자가 우리에게 강요할 때, '그래!' 하고, 악한 자를 받아 주는 마음, 여러분! 이럴 때, '악한 자'가 변화가 됩니다. 전도는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때, 그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놀람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행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선택 받은 사람'만 이 말씀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선택받은 사람만 곧 예정된 사람만 이 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행함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체적인 악한 자의 공격이 있습니까? 그냥 받아 주십시오. 안 죽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입혀 옵니까? 여러분! 다 배상해 주십시오. 여러분! 안 굶어 죽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강요가 들어옵니까? 그냥 따라 주십시오! 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더 건강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더 큰 물질적인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더 큰 우리의 삶의 여유를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공급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면서, '역시 내 아들이야!'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고, '아이구! 마귀자녀랑 똑같네!' 그런 말 듣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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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나라와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라고 말하며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1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유대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유대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갈릴리 호수 좌편이 납달리고, 납달리 바로 아래 지역이 스불론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인접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이방의 갈릴리, 지금 여기서 갈릴리를 이방이라 부릅니다. 누가? ‘이사야’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이방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범죄할 때, 그들을 쫓아내시고, 여전히 구전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 되는데, 아벨은 대표적인 사람이죠. 제사를 드린 사람이고,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어지는데, 그 때는 1,000살을 한계로 해서 900세 이상을 다 산 사람들이죠. 근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자꾸 줄어 드는 것이예요. 사람 숫자는 늘어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심지어 노아 때에 와서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방법을 쓰셨는데, 노아 가족만 남겨두고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일어 납니다. 노아 가족만 살아남고 전 지구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만
마태복음 1장(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6절
6. 그런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가 모두 14세대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까지 14세대이며, 바벨론 이주부터 그리스도까지 14세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절입니다. 이 14세대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이 그리스도를 묘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메시아 통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윗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죠.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올거야! 나중에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누군가가 올거야! 나중에 어떤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를 다스리는데, 우리는 꿈같은 삶을 살거야' 하고 구약 내내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 하셨을 때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죠. 이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왕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잘 통치해 잘 먹고 잘 살거야! 우리는 행복할 거야!'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오면, 정치적으로 왕이 되어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는 한 자리 할거야!' 그래서 다툼도 일어납니다. 자기들끼리 '자. 너는 오른편에 앉아 왼편에 앉아!'라고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한 그 이해와 사고가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다음에 모든 수난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시고 부활 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체로써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10일 뒤에 승천하시고 10일 뒤에 오순절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106절
106.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마태복음 106절 말씀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맞지요. 눈이 감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당연히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여러분! 깜깜한 밤에 횃불이 있으면 그 불 때문에 밤이 환하게 밝은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을 보게 되고 눈이 감긴 소경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 그렇죠. 눈이 멀쩡하면 밝음을 느낍니다. 왜? 태양광선을 통해서 사물을 볼 수 있으니까, 밝음을 느낍니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눈이 좋지 않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여러분! 눈만 감으면 어두움입니다. 눈만 뜨면 밝음이고, 이 눈이라는 조그마한 기관 때문에 우리 온몸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것은 육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데, 왜? 영의 세계이냐? 표현할 때, 네 눈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의 눈'이 아니고 '영의 눈'입니다. 동시에 '성하다'는 표현은 '영, 육'에 같이 쓰이는 표현인데, 이 '악하다'는 표현은 영에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구절을 이해하실 때, '아! 이 구절은 영적인 것이구나!'하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 '영의 눈'이 감긴 상태,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감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믿는 자의 악이 어디서 들어올까요? 영의 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영의 눈이 닫힌 상태, 뭐가 들어올까요?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영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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