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46절 마귀의 두번째 시험에 대한 승리_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
- 공유 링크 만들기
- 이메일
- 기타 앱
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다시 기록되었다.
마태복음 46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마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에게 지금 “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천사들이 너를 받들어 줄 거야.”하고 ‘말씀으로 시험’하는 마귀에게 ‘말씀으로 대항하는 이야기’입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것도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직전에 있는 말씀은 신명기에 있는 말씀이고 지금 말씀은 출애굽기에 있는 말씀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이 시험은 다시 말하면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전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초기적인 시험은 양식입니다. 그에 반해 이 시험은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시험입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하지 말라’ ‘시험하지 말라’가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라고 다시 기록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물리치실 때 모두 다 ‘기록되었다’로 이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로고스는 마귀에서 승리하는 비법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정말 시험할까요? 그러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니 내가 언제 하나님을 시험하나?’ ‘하나님을 시험 한 적이 없는데’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죠. ‘우리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내 계명대로 살고 있는지 보기 위함이다’고 나와 있지요.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을 시험할까요? 시험 많이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엄청 많이 시험합니다.
맛사라고 아시죠. 맛사에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나?’하고 원망하면서, 대항합니다. 그 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올 때 “‘므리바’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지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원치 않는 상황들을 많이 만납니다. ‘정말 하나님이 아버지 맞아?’하고 우리가 원망할 때 마다 불평 할 때 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사고방식이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야’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널 돕는 분이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널 치료하는 분이야’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뭘 믿냐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야’ ‘하나님은 건지시는 분이야’ 여러분이 갖고 있는 많은 신앙들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무엇으로 오염 되었느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도와 주실거야.’ 믿는 것 같지요. 굉장히 큰 믿음 같지요. 아닙니다.
이 두 번째 시험은 성경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의 시험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똑같이 여러분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항상 광야입니다. 때로는 살다 보면 우리가 질병을 만나기도 하고 어려움을 만나기도 악한 자를 만나기도 하고 재난을 당하기도 하고 우리 소원대로 안 되기도 합니다. 소원대로 다 됩니까? 인생이 과연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내 방식대로 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식’대로 흘러갑니다. 인생의 주권자는 여러분도 아니고 주권자는 누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욥처럼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바울처럼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다윗처럼 쫓겨 다니기도 하고 원치 않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라고 내가 고백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하고 어디에 귀를 기울이느냐 하면 긍정의 힘에 귀를 기울입니다. ‘더 좋은 일이 있나봐’ ‘복권에 당첨 되려나봐’, ‘뭐가 있을 거야.’ 하고 그 사건들에 대해서 자꾸만 긍정화 시킵니다. 새옹지마를 꿈꿉니다.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억울한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진정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 허용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사실이 믿음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미혹될 것입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되고 나는 행복해야 하고 나는 건강해야 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면 믿어서 좋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좋은 것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주인 되시며 여전히 나의 하나님 되십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좋은 것을 만날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도 다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 만나면 감사하다고 자기가 믿는 신에게 무엇을 드리면서 표현합니다.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 있습니까? 크리스천은 안 좋은 것을 만나도 거기서 감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 키워 보셨지요? 어떤 부모가 자식 때리면서 기분 좋아합니까? 마음이 더 찢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원치 않는 일을 주실 때는 하나님은 더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 축복이 아니라고 보는 그 상황들이 우리들에게는 사실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에 대한 여러분의 관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할 때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잘 하다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돌아서며 불평하는 그런 사람 있습니다. 박쥐입니다. 박쥐는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벽에 붙어서 기어 다니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그런 추한 모습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추한 모습이 나온 것이 바로 ‘삼박자 축복’이고 ‘긍정의 힘’이고 ‘기복신앙’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마귀가 만든 이론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이런 내용들은 구원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잃어버리는 시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도 날 버리실까?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죄를 왜 짓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설마 내가 간음죄를 지어도 날 지옥에 던지실까?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신데 설마 내가 이런 죄를 지어도 나를 버리실까? 마귀의 시험입니다. ‘설마 내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을까?’ 하와가 시험에 들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다가 왜 죄를 짓습니까? ‘설마’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모르시는군요. 어떻게 하나님이 자녀가 죄를 지었다고 버리십니까?”하고 블로그에 댓글을 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입니다. 설마 우리를 버리실까? 다윗이 범죄 한 다음에 회개 안 했으면 하나님께서 버렸을까요? 버리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오해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버리십니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의 유일한 자녀는 아담과 하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다른 자녀가 없었을 때’입니다. 최초의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내가 처음 만든 자녀인데 ‘선악과’를 따 먹으니까 버리십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여러분을 버리십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정말 믿으신다면 여러분! 죄를 짓겠습니까? 안 지을 것입니다. 죄를 왜 짓겠습니까? ‘설마 죽느냐?’ 이것입니다. ‘설마 이 죄를 지었다고 지옥 보내실까?’ 마귀의 시험입니다. 계명에 대해서 설마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어기면 지옥 갑니다!” 여러분께서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들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지어도 천국 가.’ 이런 신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거 ‘마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을 ‘다시 기록되었다’는 또 다른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46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마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에게 지금 “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천사들이 너를 받들어 줄 거야.”하고 ‘말씀으로 시험’하는 마귀에게 ‘말씀으로 대항하는 이야기’입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것도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직전에 있는 말씀은 신명기에 있는 말씀이고 지금 말씀은 출애굽기에 있는 말씀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이 시험은 다시 말하면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전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초기적인 시험은 양식입니다. 그에 반해 이 시험은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시험입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하지 말라’ ‘시험하지 말라’가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라고 다시 기록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물리치실 때 모두 다 ‘기록되었다’로 이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로고스는 마귀에서 승리하는 비법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정말 시험할까요? 그러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니 내가 언제 하나님을 시험하나?’ ‘하나님을 시험 한 적이 없는데’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죠. ‘우리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내 계명대로 살고 있는지 보기 위함이다’고 나와 있지요.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을 시험할까요? 시험 많이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엄청 많이 시험합니다.
맛사라고 아시죠. 맛사에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나?’하고 원망하면서, 대항합니다. 그 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올 때 “‘므리바’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지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원치 않는 상황들을 많이 만납니다. ‘정말 하나님이 아버지 맞아?’하고 우리가 원망할 때 마다 불평 할 때 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사고방식이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야’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널 돕는 분이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널 치료하는 분이야’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뭘 믿냐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야’ ‘하나님은 건지시는 분이야’ 여러분이 갖고 있는 많은 신앙들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무엇으로 오염 되었느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도와 주실거야.’ 믿는 것 같지요. 굉장히 큰 믿음 같지요. 아닙니다.
이 두 번째 시험은 성경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의 시험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똑같이 여러분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항상 광야입니다. 때로는 살다 보면 우리가 질병을 만나기도 하고 어려움을 만나기도 악한 자를 만나기도 하고 재난을 당하기도 하고 우리 소원대로 안 되기도 합니다. 소원대로 다 됩니까? 인생이 과연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내 방식대로 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식’대로 흘러갑니다. 인생의 주권자는 여러분도 아니고 주권자는 누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욥처럼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바울처럼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다윗처럼 쫓겨 다니기도 하고 원치 않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라고 내가 고백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하고 어디에 귀를 기울이느냐 하면 긍정의 힘에 귀를 기울입니다. ‘더 좋은 일이 있나봐’ ‘복권에 당첨 되려나봐’, ‘뭐가 있을 거야.’ 하고 그 사건들에 대해서 자꾸만 긍정화 시킵니다. 새옹지마를 꿈꿉니다.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억울한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진정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 허용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사실이 믿음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미혹될 것입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되고 나는 행복해야 하고 나는 건강해야 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면 믿어서 좋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좋은 것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주인 되시며 여전히 나의 하나님 되십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좋은 것을 만날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도 다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 만나면 감사하다고 자기가 믿는 신에게 무엇을 드리면서 표현합니다. 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 있습니까? 크리스천은 안 좋은 것을 만나도 거기서 감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 키워 보셨지요? 어떤 부모가 자식 때리면서 기분 좋아합니까? 마음이 더 찢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원치 않는 일을 주실 때는 하나님은 더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 축복이 아니라고 보는 그 상황들이 우리들에게는 사실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에 대한 여러분의 관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할 때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잘 하다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돌아서며 불평하는 그런 사람 있습니다. 박쥐입니다. 박쥐는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벽에 붙어서 기어 다니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그런 추한 모습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추한 모습이 나온 것이 바로 ‘삼박자 축복’이고 ‘긍정의 힘’이고 ‘기복신앙’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마귀가 만든 이론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이런 내용들은 구원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잃어버리는 시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도 날 버리실까?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죄를 왜 짓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설마 내가 간음죄를 지어도 날 지옥에 던지실까?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신데 설마 내가 이런 죄를 지어도 나를 버리실까? 마귀의 시험입니다. ‘설마 내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을까?’ 하와가 시험에 들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다가 왜 죄를 짓습니까? ‘설마’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모르시는군요. 어떻게 하나님이 자녀가 죄를 지었다고 버리십니까?”하고 블로그에 댓글을 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입니다. 설마 우리를 버리실까? 다윗이 범죄 한 다음에 회개 안 했으면 하나님께서 버렸을까요? 버리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오해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버리십니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의 유일한 자녀는 아담과 하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다른 자녀가 없었을 때’입니다. 최초의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내가 처음 만든 자녀인데 ‘선악과’를 따 먹으니까 버리십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여러분을 버리십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정말 믿으신다면 여러분! 죄를 짓겠습니까? 안 지을 것입니다. 죄를 왜 짓겠습니까? ‘설마 죽느냐?’ 이것입니다. ‘설마 이 죄를 지었다고 지옥 보내실까?’ 마귀의 시험입니다. 계명에 대해서 설마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어기면 지옥 갑니다!” 여러분께서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들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지어도 천국 가.’ 이런 신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거 ‘마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을 ‘다시 기록되었다’는 또 다른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51절
51.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나라와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라고 말하며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1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유대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유대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갈릴리 호수 좌편이 납달리고, 납달리 바로 아래 지역이 스불론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인접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이방의 갈릴리, 지금 여기서 갈릴리를 이방이라 부릅니다. 누가? ‘이사야’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이방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범죄할 때, 그들을 쫓아내시고, 여전히 구전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 되는데, 아벨은 대표적인 사람이죠. 제사를 드린 사람이고,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어지는데, 그 때는 1,000살을 한계로 해서 900세 이상을 다 산 사람들이죠. 근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자꾸 줄어 드는 것이예요. 사람 숫자는 늘어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심지어 노아 때에 와서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방법을 쓰셨는데, 노아 가족만 남겨두고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일어 납니다. 노아 가족만 살아남고 전 지구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만
마태복음 1장(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6절
6. 그런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가 모두 14세대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까지 14세대이며, 바벨론 이주부터 그리스도까지 14세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절입니다. 이 14세대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이 그리스도를 묘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메시아 통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윗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죠.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올거야! 나중에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누군가가 올거야! 나중에 어떤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를 다스리는데, 우리는 꿈같은 삶을 살거야' 하고 구약 내내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 하셨을 때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죠. 이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왕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잘 통치해 잘 먹고 잘 살거야! 우리는 행복할 거야!'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오면, 정치적으로 왕이 되어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는 한 자리 할거야!' 그래서 다툼도 일어납니다. 자기들끼리 '자. 너는 오른편에 앉아 왼편에 앉아!'라고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한 그 이해와 사고가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다음에 모든 수난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시고 부활 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체로써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10일 뒤에 승천하시고 10일 뒤에 오순절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106절
106.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마태복음 106절 말씀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맞지요. 눈이 감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당연히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여러분! 깜깜한 밤에 횃불이 있으면 그 불 때문에 밤이 환하게 밝은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을 보게 되고 눈이 감긴 소경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즉 만약 네 눈이 성하다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 그렇죠. 눈이 멀쩡하면 밝음을 느낍니다. 왜? 태양광선을 통해서 사물을 볼 수 있으니까, 밝음을 느낍니다. '만약 네 눈이 악하다면' 눈이 좋지 않다면 '네 온 몸은 어두울 것이다' 여러분! 눈만 감으면 어두움입니다. 눈만 뜨면 밝음이고, 이 눈이라는 조그마한 기관 때문에 우리 온몸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것은 육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의 세계인데, 왜? 영의 세계이냐? 표현할 때, 네 눈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의 눈'이 아니고 '영의 눈'입니다. 동시에 '성하다'는 표현은 '영, 육'에 같이 쓰이는 표현인데, 이 '악하다'는 표현은 영에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눈은 몸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구절을 이해하실 때, '아! 이 구절은 영적인 것이구나!'하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 '영의 눈'이 감긴 상태,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감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믿는 자의 악이 어디서 들어올까요? 영의 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영의 눈이 닫힌 상태, 뭐가 들어올까요? 하나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영의 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