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2장(산상수훈) 62절-애통은 나의 애절한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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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애통하는 자들은 복있으니, 그들이 위로받을 것이다.
오늘은 마태복음 62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 있으니’
여러분들이 많이 아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팔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할 때, ‘의’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천국에 들여보내고, 죄인들은 지옥에 보내는데, 죄를 알려주는 것이 계명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기 위한 것이 ‘규례’입니다. 전파로 이어진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영의 가난함이 첫 번째 ‘의’라고 말씀드렸고, 오늘 말씀은 ‘애통’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 공로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완전한 오해입니다. 믿음은 애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애통을 줍니다. 믿음은 영에 가난함을 주어서 은혜를 받게 하고, 그 가운에 평강을 누리며 살게 합니다. 또한 믿음은 애통을 주어서, 죄를 사함 받게 합니다. 영의 성결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통을 원하십니다. 애통은 나의 애절한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슴을 치고 눈물로 회개해도, 하나님이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애통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애통은 이런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못하고 뉘우치지 않으면 회초리로 때립니다. 그 때, 그 자식이 진심으로 죄에 대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순간 부모 마음이 뭉클해 집니다. 내가 저 아이를 왜 때렸나? 그리고 부모 마음이 너무 아파서 회초리를 거두고 그 종아리에 난 상처를 보면서 부모가 어루만지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 애통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애통에 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울음이 하나님의 울음을 터트려야 합니다. 이것이 애통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어지는 말씀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이 위로 받을 것이다’ 여러분! 애통은 위로가 오는데, 이 위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서 때렸던, 그 때림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루만지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가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그 혼냄에 대해서, 그 징계에 대해서, 그 채찍에 대해서, 그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이죠. 그 때 요나가 하나님 앞에 애통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지만, 요나의 영에서 흘러나오는 그 애통이 들리지 않았다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었죠. 그러나 요나의 그 애통이 하나님께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삼킨 물고기에게, 구토를 일으키고 요나를 땅에 내보내게 합니다. 여러분! 애통은 회복의 위로를 오게 합니다.
요나는 회개하고, 다마스커스 곧 앗시리아 수도에 가서 전파합니다. 자! 하나님이 이 앗시리아를 다 멸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때, 요나 선지자의 외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개하라’입니다. 드디어 앗시리아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라는 대 선지자, 세계적인 선지자, 역대에 없는 선지자, 그런 선지자를 통해 ‘너 죽으리라’ 하는 예언을 듣습니다. 여러분! 이 선지자는 여러분이 아는 예언 은사자 정도가 아닙니다. 요즘의 세계적인 예언가 정도도 아닙니다. 이사야는 시대적인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그 날부터 하나님 앞에 벽을 향하여 회개합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마음을 돌립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15년을 더 삽니다. 여러분! 애통은 반드시 위로를 줍니다. 이 위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지옥 보내리라!’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멸망시키리라’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 계획이 무너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서 ‘지옥에 보내리라’하는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명’의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패가망신’의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애통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제가 1년 동안 지은 죄 용서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도 ‘그래. 내가 용서할께!’ 그러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시려면, 여러분이 용서 받을 만한, ‘응당한 영적인 무언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밖에 없는 영적인 그 무엇이 애통입니다. 애통 속에는 눈물도 있고, 통회도 있고, 가슴 침도 있고, 회한도 있고, 결심도 있고, 많은 것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용서를 해 주는 당사자가 용서받는 자에 대해서, ‘내가 왜 그랬지?’하고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애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냥 눈물 한 두 방울 가지고, ‘내가 회개했기에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어!’라고 죄사함의 자위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30년 전에 지은 죄이든, 내가 애기 때부터 지은 죄이든, 죄는 행위록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죄가 행위록에 다 기록됩니다. 참회는 기록된 그 죄가 실제로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 죄가 실제로 지워지는데 무엇으로 지워집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지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는 것이고, 씻을 때 우리 눈에는 눈물이 나오고, 우리 마음에는 애절함과 통곡이 나오고,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애통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영혼에 전달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이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문제해결의 가장 빠른 지름길은 애통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하셨는가를, 애통할 때 이해하게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로 만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애통은 애통할 수 밖에 없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지름길로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 애통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2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 있으니’
여러분들이 많이 아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팔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할 때, ‘의’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천국에 들여보내고, 죄인들은 지옥에 보내는데, 죄를 알려주는 것이 계명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기 위한 것이 ‘규례’입니다. 전파로 이어진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영의 가난함이 첫 번째 ‘의’라고 말씀드렸고, 오늘 말씀은 ‘애통’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 공로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완전한 오해입니다. 믿음은 애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애통을 줍니다. 믿음은 영에 가난함을 주어서 은혜를 받게 하고, 그 가운에 평강을 누리며 살게 합니다. 또한 믿음은 애통을 주어서, 죄를 사함 받게 합니다. 영의 성결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통을 원하십니다. 애통은 나의 애절한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슴을 치고 눈물로 회개해도, 하나님이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애통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애통은 이런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못하고 뉘우치지 않으면 회초리로 때립니다. 그 때, 그 자식이 진심으로 죄에 대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순간 부모 마음이 뭉클해 집니다. 내가 저 아이를 왜 때렸나? 그리고 부모 마음이 너무 아파서 회초리를 거두고 그 종아리에 난 상처를 보면서 부모가 어루만지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 애통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애통에 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울음이 하나님의 울음을 터트려야 합니다. 이것이 애통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어지는 말씀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이 위로 받을 것이다’ 여러분! 애통은 위로가 오는데, 이 위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서 때렸던, 그 때림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루만지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가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그 혼냄에 대해서, 그 징계에 대해서, 그 채찍에 대해서, 그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이죠. 그 때 요나가 하나님 앞에 애통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지만, 요나의 영에서 흘러나오는 그 애통이 들리지 않았다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었죠. 그러나 요나의 그 애통이 하나님께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삼킨 물고기에게, 구토를 일으키고 요나를 땅에 내보내게 합니다. 여러분! 애통은 회복의 위로를 오게 합니다.
요나는 회개하고, 다마스커스 곧 앗시리아 수도에 가서 전파합니다. 자! 하나님이 이 앗시리아를 다 멸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때, 요나 선지자의 외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개하라’입니다. 드디어 앗시리아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라는 대 선지자, 세계적인 선지자, 역대에 없는 선지자, 그런 선지자를 통해 ‘너 죽으리라’ 하는 예언을 듣습니다. 여러분! 이 선지자는 여러분이 아는 예언 은사자 정도가 아닙니다. 요즘의 세계적인 예언가 정도도 아닙니다. 이사야는 시대적인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그 날부터 하나님 앞에 벽을 향하여 회개합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마음을 돌립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15년을 더 삽니다. 여러분! 애통은 반드시 위로를 줍니다. 이 위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지옥 보내리라!’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멸망시키리라’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 계획이 무너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서 ‘지옥에 보내리라’하는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명’의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패가망신’의 계획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애통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제가 1년 동안 지은 죄 용서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도 ‘그래. 내가 용서할께!’ 그러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시려면, 여러분이 용서 받을 만한, ‘응당한 영적인 무언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밖에 없는 영적인 그 무엇이 애통입니다. 애통 속에는 눈물도 있고, 통회도 있고, 가슴 침도 있고, 회한도 있고, 결심도 있고, 많은 것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용서를 해 주는 당사자가 용서받는 자에 대해서, ‘내가 왜 그랬지?’하고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애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냥 눈물 한 두 방울 가지고, ‘내가 회개했기에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어!’라고 죄사함의 자위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시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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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는 것이고, 씻을 때 우리 눈에는 눈물이 나오고, 우리 마음에는 애절함과 통곡이 나오고,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애통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영혼에 전달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이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문제해결의 가장 빠른 지름길은 애통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하셨는가를, 애통할 때 이해하게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로 만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애통은 애통할 수 밖에 없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지름길로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 애통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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