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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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오호 하늘들에서 “이 자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리.
마태복음 40절 말씀입니다. ‘오호’ 오호는 강조할 때 쓰는 감탄의태어인데 저는 ‘오호’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늘들에서’ 하늘들은 이 땅의 하늘이 아니고 천국이죠. 천국은 항상 복수를 항상 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셋째 하늘’이란 말을 쓰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늘이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국에 갔다 온’ 그런 표현을 할 때 항상 복수를 씁니다. 그래서 하늘들 하면 ‘영적인 세계의 하늘들’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늘이 저기 멀리 있을까요? 하늘이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넘어서 저 멀리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공간 세계에서의 하늘이지 영적인 세계는 공간의 개념이 없습니다. 지옥이 지구 중심에 있을까요? 영적인 세계는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세계는 시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공간이 없기 때문에 다 보십니다.
성령 세례는 이 땅에서 보이는 현상이죠. 그런데 이 현상에 대한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묘사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의 성령 세례를 어떻게 묘사하는가?’입니다. ‘이 자는’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다. 라고 말하는 소리’ 여러분 이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일까요? 영계에서는 음성 파장이 없습니다. 영계에서 말하는 소리는 영적인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리가 지금처럼 세례 받을 때 ‘위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시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영적인 음성이지 절대 우리 육체의 귀에 들리는 음성이 아닌 것입니다.
또 과거에 역사적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언제 어느 시에 회심했다고 말을 합니다. 미친 짓들입니다! 구원은 내가 느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은 내가 경험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감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느낀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것을 경험해서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하늘들의 있는 소리’입니다. 깨달을 때 자기 마음에 들려오는 소리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파에 계신 분들은 빨리 말씀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구원파에 계신 분들은 우리 사이트에 있는 말씀들로 다시 배우시든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유병언 아시죠? 지옥 갔지 않습니까?
거듭남이 눈에 보인다? 특별한 경우도 있긴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 안 보입니다. 대부분의 거듭남은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39절에 보니까 ‘그 분에게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령 세례가 임할 때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안 보입니다. 여러분 성령 세례를 안 받아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의 여정에 출발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총체적인 결과물이고 거듭남은 이제 출발 된 것입니다.
공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볼링공이 핀을 향해 표시된 화살표 방향으로 갑니다. 그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도 구원은 아닙니다. 성령 세례는 구원의 여정상 ‘이제 웬만하면 구원이 이탈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여정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볼링장 화살표를 통과할 때 그 때 ‘하늘들에서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소리 이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화살표를 지나면 볼링공은 마지막에 있는 화살표 끝자락에 볼링 핀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100%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 맞춥니다. 어떤 볼링공은 가다가 옆으로 이탈되기도 합니다. 누구입니까?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 세례 받으면 쫓아낼 수 있지요. 주의 이름으로 예언 하며, 예언도 성령 세례 받으면 할 수 있지요.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며, 이런 것은 성령 세례 받고서 오는 은사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전히 구원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내가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구원은 관계이지 그냥 끝난 사건도 아니고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구원입니다. 볼링공이 지금 레일 안에 있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믿음에서 떨어지면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내가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향해서 ‘내가 널 사랑해’ 이 관계가 구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널 기뻐해’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구원파는 마치 과거의 사건처럼 말합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과거의 거듭남이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파에 계신 분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거의 대부분 지옥에 들어갑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사랑 가운데 있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 땐 내가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음성이 영속적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 받은 자녀로의 삶을 살면 이 소리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받을 때만 이런 소리가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에 있는 상태에서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기뻐하는 자라’하는 소리를 늘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학교를 갑니다. 부모가 늘 자녀 때문에 기뻐합니다. 자녀가 학교에 가도 기쁘고 집에 와도 기쁘고 자녀가 뛰어 놀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거듭남도 안 보이고 순종도 안 보이고 다 안 보입니다. 그런데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구원파 여러분 이렇게 해 보십시오! 구원 받았냐고 묻지 마시고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이것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성경에 없는 것을 말하십니까? 어디 성경에서 ‘당신 구원 받았느냐?’라고 물어 본 사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말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원어로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냐?’고 물어 봅니다. 여러분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이 더 정확안 것입니다. ‘구원 받았느냐?’ 성경에 없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임파테이션이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적 치유’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없는 것 자꾸 만들지 마십시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유체이탈이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유체이탈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한 사람 죽었다가 살아나서 간증한 사람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는 관계, 그것이 구원이며 구원 안에 있을 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40절의 말씀을 계속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40절 말씀입니다. ‘오호’ 오호는 강조할 때 쓰는 감탄의태어인데 저는 ‘오호’로 번역하였습니다. ‘하늘들에서’ 하늘들은 이 땅의 하늘이 아니고 천국이죠. 천국은 항상 복수를 항상 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셋째 하늘’이란 말을 쓰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늘이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국에 갔다 온’ 그런 표현을 할 때 항상 복수를 씁니다. 그래서 하늘들 하면 ‘영적인 세계의 하늘들’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늘이 저기 멀리 있을까요? 하늘이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넘어서 저 멀리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공간 세계에서의 하늘이지 영적인 세계는 공간의 개념이 없습니다. 지옥이 지구 중심에 있을까요? 영적인 세계는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세계는 시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공간이 없기 때문에 다 보십니다.
성령 세례는 이 땅에서 보이는 현상이죠. 그런데 이 현상에 대한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묘사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의 성령 세례를 어떻게 묘사하는가?’입니다. ‘이 자는’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다. 라고 말하는 소리’ 여러분 이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일까요? 영계에서는 음성 파장이 없습니다. 영계에서 말하는 소리는 영적인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리가 지금처럼 세례 받을 때 ‘위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시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영적인 음성이지 절대 우리 육체의 귀에 들리는 음성이 아닌 것입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글쎄요?’ 또는 ‘당신은 구원 받은 날짜를 아십니까?’ ‘글쎄요?’ ‘구원에 관한 설명을 들으러 오세요. 세미나가 있습니다. 잘 설명 드릴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서 복음을 설명 듣습니다. 감동이 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깨달음이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과거에 역사적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언제 어느 시에 회심했다고 말을 합니다. 미친 짓들입니다! 구원은 내가 느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은 내가 경험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감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느낀다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것을 경험해서 구원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하늘들의 있는 소리’입니다. 깨달을 때 자기 마음에 들려오는 소리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파에 계신 분들은 빨리 말씀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구원파에 계신 분들은 우리 사이트에 있는 말씀들로 다시 배우시든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유병언 아시죠? 지옥 갔지 않습니까?
거듭남이 눈에 보인다? 특별한 경우도 있긴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 안 보입니다. 대부분의 거듭남은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39절에 보니까 ‘그 분에게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령 세례가 임할 때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안 보입니다. 여러분 성령 세례를 안 받아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의 여정에 출발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총체적인 결과물이고 거듭남은 이제 출발 된 것입니다.
공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볼링공이 핀을 향해 표시된 화살표 방향으로 갑니다. 그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도 구원은 아닙니다. 성령 세례는 구원의 여정상 ‘이제 웬만하면 구원이 이탈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여정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볼링장 화살표를 통과할 때 그 때 ‘하늘들에서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하는 소리 이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화살표를 지나면 볼링공은 마지막에 있는 화살표 끝자락에 볼링 핀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100%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 맞춥니다. 어떤 볼링공은 가다가 옆으로 이탈되기도 합니다. 누구입니까?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 세례 받으면 쫓아낼 수 있지요. 주의 이름으로 예언 하며, 예언도 성령 세례 받으면 할 수 있지요.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며, 이런 것은 성령 세례 받고서 오는 은사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전히 구원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내가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구원은 관계이지 그냥 끝난 사건도 아니고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구원입니다. 볼링공이 지금 레일 안에 있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믿음에서 떨어지면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내가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향해서 ‘내가 널 사랑해’ 이 관계가 구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널 기뻐해’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구원파는 마치 과거의 사건처럼 말합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과거의 거듭남이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파에 계신 분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거의 대부분 지옥에 들어갑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사랑 가운데 있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 땐 내가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음성이 영속적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 받은 자녀로의 삶을 살면 이 소리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받을 때만 이런 소리가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에 있는 상태에서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기뻐하는 자라’하는 소리를 늘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학교를 갑니다. 부모가 늘 자녀 때문에 기뻐합니다. 자녀가 학교에 가도 기쁘고 집에 와도 기쁘고 자녀가 뛰어 놀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거듭남도 안 보이고 순종도 안 보이고 다 안 보입니다. 그런데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구원파 여러분 이렇게 해 보십시오! 구원 받았냐고 묻지 마시고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이것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성경에 없는 것을 말하십니까? 어디 성경에서 ‘당신 구원 받았느냐?’라고 물어 본 사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말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원어로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냐?’고 물어 봅니다. 여러분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이 더 정확안 것입니다. ‘구원 받았느냐?’ 성경에 없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임파테이션이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적 치유’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없는 것 자꾸 만들지 마십시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유체이탈이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유체이탈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한 사람 죽었다가 살아나서 간증한 사람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는 관계, 그것이 구원이며 구원 안에 있을 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40절의 말씀을 계속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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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리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어두움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나라와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라고 말하며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1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유대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유대 예루살렘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나사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떠나신 것입니다.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갈릴리 호수 좌편이 납달리고, 납달리 바로 아래 지역이 스불론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인접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사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묘사했다고 말씀 드렸었죠.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단 건너 바다 길, 이방의 갈릴리’ 이방의 갈릴리, 지금 여기서 갈릴리를 이방이라 부릅니다. 누가? ‘이사야’가,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갈릴리’를 ‘이방이다’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심각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범죄할 때, 그들을 쫓아내시고, 여전히 구전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증거 되는데, 아벨은 대표적인 사람이죠. 제사를 드린 사람이고,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 이어지는데, 그 때는 1,000살을 한계로 해서 900세 이상을 다 산 사람들이죠. 근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자꾸 줄어 드는 것이예요. 사람 숫자는 늘어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줄어드는 거예요. 심지어 노아 때에 와서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 방법을 쓰셨는데, 노아 가족만 남겨두고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일어 납니다. 노아 가족만 살아남고 전 지구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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