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5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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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시다가 바다로 그물을 던지는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보셨으며, 그들이 어부였기 때문인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 와라, 너희를 사람들의 어부들로 만들 것이다.”
마태복음 53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버나움에서 사셨고,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시다가’ 참 낭만적인 것 같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시다가, 바닷가가 참 아름답습니다. 갈릴리는 호수입니다. 자꾸 바다로 쓰이는 이유는,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바다로 그물을 던지는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재밌어요. 그냥 베드로라고 하면 되는데, ‘시몬’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보셨으며’ 아니? 제가 책을 쓰면 ‘베드로와 안드레’ 라고 할텐데, 마태는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셨으며’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시몬’ 원래 이름이 ‘시몬’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지금 안드레와 베드로를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입니다. 아마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성도였고, 분명히 세례 요한이 ‘안드레’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라’ 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미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라”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하였고, 더 나아가서 ‘메시야’임을 말했기 때문에, 안드레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또한 그 전에,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전도를 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하고 전도한 상태입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신앙이 있는 그런 상태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딱 보자마자, “어우~ 너 나 믿게 생겼다. 날 따라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본적인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갑자기 어느 날,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과정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구원 받은 강도가 있었지요. 그 강도가 어느 날, 갑자기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언제 강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할 때, ‘어느 순간’, 여러분! 그런 것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어느 순간’ ‘뿅’ 가고 ‘제자가 되고’ 아닙니다! 다 과정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과정들을 다 생략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80세에 갑자기 시내 산에서 하나님 만나서 쓰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많은 과정들이 생략된 것입니다.
여기, ‘나를 따라와라’ 무엇이죠?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지금 안드레와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어부에게, ‘너 나 따라와’ 이것은 굉장한,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생업이 있는 사람한테, ‘날 따라와’ 이것은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처럼 랍비도 있었고, 종교적인 부분에서 예수님처럼, 심취해서 활동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을까요? 잃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왜? 목사들은 지옥 가는데, 제자들은 지옥을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은 제자가 되지 아니하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그리고 어떤 선교사가 되고, 그런데 지옥에 들어갑니다. 너무 황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해서 ‘나를 따라오라’하시는데, 여러분은 뭐하시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제자는 누구냐 하면?’, ‘평생 예수님만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가룟유다 빼고, 다 순교의 길을 갑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합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로 순교 당합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이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돈벌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나 안드레가,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가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수입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겠습니까? NO !
저는 대부분의 목사님을 ‘미치광이’라고 표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사역들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베드로와 안드레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날 따라와!’ 여러분! 생계를 접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내 수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여러분들은 뭐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수입을 위해서’ 합니다. 여럴분! 수입을 위해서 주님을 따릅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수입을 버립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부는 좋은 직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입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교회 부흥’을 왜 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에게는 ‘교회 부흥’이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가운데 교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지, ‘교회 부흥’외치다가 지옥갑니다. ‘성전 건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따르는 것’이 본론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사활을 건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은 ‘종교 기득권’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통하여, 수입을 기대하고, 자녀를 유학 보내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결받습니다. 그것이 제자입니까? 여러분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익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파는 삯군’ 인 것입니다. 여러분 대다수가 ‘삯군’인 것을 빨리 아셔야 합니다. ‘삯꾼’은 ‘일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는 임금 노동자‘에 대한 예수님 당시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돈이 주어지지 않아도, 아니 여기 베드로처럼 안드레처럼 생계를 잃어버리는 결정‘을 하는 것이 ’제자‘인데 여러분은 ’목사‘가 되면, 월급이 주어지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예수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에서 여러분을 건져서 천국으로 옮긴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다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 줄 아십니까? ‘이 땅을 위해서, 자기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1000% 지옥’입니다. 그냥 직업 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것은 직업입니다. 여러분! 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좋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입니다. 120세 무병장수를 위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오래 살아서 한 명의 영혼이라도 천국으로 인도하고픈 마음, 한가지입니다.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53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버나움에서 사셨고,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시다가’ 참 낭만적인 것 같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시다가, 바닷가가 참 아름답습니다. 갈릴리는 호수입니다. 자꾸 바다로 쓰이는 이유는,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바다로 그물을 던지는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재밌어요. 그냥 베드로라고 하면 되는데, ‘시몬’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보셨으며’ 아니? 제가 책을 쓰면 ‘베드로와 안드레’ 라고 할텐데, 마태는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셨으며’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시몬’ 원래 이름이 ‘시몬’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지금 안드레와 베드로를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입니다. 아마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성도였고, 분명히 세례 요한이 ‘안드레’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라’ 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미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라”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하였고, 더 나아가서 ‘메시야’임을 말했기 때문에, 안드레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또한 그 전에,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전도를 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하고 전도한 상태입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신앙이 있는 그런 상태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딱 보자마자, “어우~ 너 나 믿게 생겼다. 날 따라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본적인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갑자기 어느 날,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과정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구원 받은 강도가 있었지요. 그 강도가 어느 날, 갑자기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언제 강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할 때, ‘어느 순간’, 여러분! 그런 것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어느 순간’ ‘뿅’ 가고 ‘제자가 되고’ 아닙니다! 다 과정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과정들을 다 생략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80세에 갑자기 시내 산에서 하나님 만나서 쓰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많은 과정들이 생략된 것입니다.
여기, ‘나를 따라와라’ 무엇이죠?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지금 안드레와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어부에게, ‘너 나 따라와’ 이것은 굉장한,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생업이 있는 사람한테, ‘날 따라와’ 이것은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처럼 랍비도 있었고, 종교적인 부분에서 예수님처럼, 심취해서 활동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을까요? 잃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왜? 목사들은 지옥 가는데, 제자들은 지옥을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은 제자가 되지 아니하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그리고 어떤 선교사가 되고, 그런데 지옥에 들어갑니다. 너무 황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해서 ‘나를 따라오라’하시는데, 여러분은 뭐하시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제자는 누구냐 하면?’, ‘평생 예수님만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가룟유다 빼고, 다 순교의 길을 갑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합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로 순교 당합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이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돈벌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나 안드레가,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가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수입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겠습니까? NO !
저는 대부분의 목사님을 ‘미치광이’라고 표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사역들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베드로와 안드레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날 따라와!’ 여러분! 생계를 접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내 수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여러분들은 뭐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수입을 위해서’ 합니다. 여럴분! 수입을 위해서 주님을 따릅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수입을 버립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부는 좋은 직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입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교회 부흥’을 왜 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에게는 ‘교회 부흥’이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가운데 교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지, ‘교회 부흥’외치다가 지옥갑니다. ‘성전 건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따르는 것’이 본론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사활을 건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은 ‘종교 기득권’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통하여, 수입을 기대하고, 자녀를 유학 보내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결받습니다. 그것이 제자입니까? 여러분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익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파는 삯군’ 인 것입니다. 여러분 대다수가 ‘삯군’인 것을 빨리 아셔야 합니다. ‘삯꾼’은 ‘일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는 임금 노동자‘에 대한 예수님 당시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돈이 주어지지 않아도, 아니 여기 베드로처럼 안드레처럼 생계를 잃어버리는 결정‘을 하는 것이 ’제자‘인데 여러분은 ’목사‘가 되면, 월급이 주어지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예수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에서 여러분을 건져서 천국으로 옮긴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다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 줄 아십니까? ‘이 땅을 위해서, 자기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1000% 지옥’입니다. 그냥 직업 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것은 직업입니다. 여러분! 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좋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입니다. 120세 무병장수를 위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오래 살아서 한 명의 영혼이라도 천국으로 인도하고픈 마음, 한가지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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