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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7절





7.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이렇습니다.

7절은 짧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출생은 이렇습니다'가 오늘 나눌 말씀입니다. 이제까지는 예수님하고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마태가 기록하다가 처음으로 7절 들어가서 '예수그리스도'라고 붙입니다. 지금 처음 붙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처음으로 '예수그리스도'라고 표현을 합니다. 실제 여기서 말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출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단순히 출생하셨다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의 메시아가 되어 주시고 나의 통치자가 되어 주셔서 내 안에서 출생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출생이 바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내주하심이 나에게 나타나심이 되는 것을 거듭남의 경험 또는 회심의 경험이라 부릅니다. 이 거듭남이란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지, 나 오늘 예수님을 영접했어. 오늘 설교 말씀을 들었는데 은혜를 받았어, 내가 어느 집회에 참석해서 3박 4일 말씀을 들었는데 예수가 깨달아지더라. 예수님은 정말 귀한 분이야! 깨달았어. 그 분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어. 나는 주님을 믿어.” 하는 것을 거듭남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교회를 가면 “오늘 교회 오신 분들은 저를 따라 하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순간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라고 따라 하게 한 뒤에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것은 통상 내 혼이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내 혼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나의 ‘지, 정, 의’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 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거듭남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영, 곧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오늘 잠깐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내 영이 있습니다. 내 영이 육체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내 육체가 내 영을 담고 있습니다. 그 때 원 귀신이 같이 출생됩니다. 원 귀신이 우리 육체 안에 따로 거하는데 우리 육체 안에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 원 귀신이 같이 출생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모두 날 때부터 귀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내 영이 원 귀신에서 제재를 받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음란하게 되고 권위에 대해 순종하지 않게 되고 탐심을 갖게 되는 등 이런 모든 원 귀신의 영향을 늘 받으며 살게 됩니다. 늘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혼자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 할지라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원 귀신이 우리 안에서 계속 우리에게 죄를 전달시키기 때문에 내 영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할지라도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를 안 지으며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100% 지옥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을 자연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자연인이 성경말씀을 읽거나 예배를 참석하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에 어느 순간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제는 내 영이 있고 그리고 원 귀신도 있고 성령님이 계신 3중 인격체로 변화가 됩니다. 그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육체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의 본체이신 성령님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고통이 시작됩니다. 어떤 고통이냐 하면 이제까지는 원 귀신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어서, 음란과 거짓과 탐심과 미움과 온갖 악들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성령님이 내주 할 때부터 "음란하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거짓말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하고 우리 안에서 계명을 깨닫게 하심으로 내 영이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것은 '중생' 곧 씻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나 단순한 교리에 관한 말씀이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은 씻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주체할 수 없는 씻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중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중생을 설명 할 때에 '양심에 피 뿌림을 받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양심에 작용되어 양심이 살아나는 영적인 출생이 바로 중생입니다. 그 전까지는 내 영이 원 귀신의 영향을 받고 살아 양심이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내 양심이 깨끗하게 됩니다. 내 양심이 죄를 용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를 지어도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며 죄가 용납되는 설교는 가짜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 가짜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음으로 드디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가짜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죄에서의 해방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지적입니다. '너 이런 죄를 짓고 있어!'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너는 이런 죄를 짓고 있어!' 하고 양심이 발동합니다. 그 양심이 깨끗하게 됐기 때문에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때문에 힘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님의 통치, 내주하심을 통하여서 항상 제재가 따라옵니다. 죄를 지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석연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시는데 죄를 짓는 나를 가만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음란한 나를 가만히 지켜만 보시겠습니까? 통치라는 것은 왕의 통치를 말합니다. 나에게 왕이 되어서 나에 대하여 그 분의 주장을 펴시는 것 입니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고 옆에서 끊임없이 자극하십니다. 이것이 통치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나를 통치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그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통치하는데, 무엇을 통치하시느냐? 이제까지 지은 죄들에 대해서 간섭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어서 통치하시는데 그 통치의 본질은 다윗 왕처럼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알려 줍니다.

조선시대 때에 토마스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 왔죠. 그 때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그 당시 조선시대에는 화투를 많이 쳤는데 “여러분 화투치지 마십시오! 계집질하지 마십시오!" 옛날 사람들은 기생집에 많이 갔었죠. “여러분 술 마시지 마십시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막걸리를 많이 마셨는데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담배 피우지 마십시오!" 옛날에 무리 나라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여러분 우상에게 제사하지 마십시오!" 이 다섯 가지가 토마스 선교사가 국내에 복음을 들고 오면서 가지고 있는 규례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다섯가지 규례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에 신교인 우리나라 장로교가 깨끗했던 이유, 그리고 일제시대 때에 1%의 크리스천들이 빛을 발했던 이유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말씀대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이십니까? 과연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십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죄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사람만이 속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속죄의 이론을 증거 합니다. 구원의 이론을 증거 합니다. 그런 거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내가 속죄에 대한 이론을 몰라도 그냥 속죄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속죄 이론들이 맨 뒤에 나옵니다. 로마서부터 속죄의 이론들이 나오죠. 속죄 이론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속죄는 예수님이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통치를 받는 자기 백성들에게 속죄를 적용시키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확신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시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통치하신다면 자동적으로 다윗처럼 구원 받습니다. 다윗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너무 아름다워서 다윗처럼 성경에 묘사가 많이 된 인물은 없습니다. 여러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인물 탐구를 쭉~ 해 보십시오. 가장 많은 성령의 증거는 다윗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모든 삶들이 예수님에게서 통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은 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너 이렇게 살아야지, 사랑 해야지, 용서 해야지, 이렇게 해야지’ 하고 우리 안에서 자꾸 말씀하십니다. 그게 의입니다. 성령님은 첫 번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 이제 기도해야지, 너 주일 성수해야지, 너 부모님을 공경해야지, 너 이제 더 거룩해야지' 하고 의를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경고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너 계속 죄를 지으면 내가 너를 버릴 거야', '너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징계할거야.' 이런 경고들이 심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반드시 경고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 지금처럼 지내면 지옥간다.' 이것이 성령님의 음성인줄 아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죄를 지적하시고 의를 말씀하시며 심판을 말씀 하십니다. 그 심판은 이 땅의 하나님의 심판 및 징계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 모든 징계, 심판, 지옥들은 다 성령님의 음성인줄 아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성령님은 참 좋으신 분이야. 사랑이 많으셔.' 라고 착각합니다. 때로는 성령님의 분노가 맹렬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히브리서를 보시면 압니다. 성령님의 분노는 맹렬하여서 광야(시나이 반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자기 백성 대부분을 지옥에 던지십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면 여러분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를 지적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거부하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에게 늘 말씀하십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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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출생이 바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내주하심이 나에게 나타나심이 되는 것을 거듭남의 경험 또는 회심의 경험이라 부릅니다. 이 거듭남이란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지, 나 오늘 예수님을 영접했어. 오늘 설교 말씀을 들었는데 은혜를 받았어, 내가 어느 집회에 참석해서 3박 4일 말씀을 들었는데 예수가 깨달아지더라. 예수님은 정말 귀한 분이야! 깨달았어. 그 분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어. 나는 주님을 믿어.” 하는 것을 거듭남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교회를 가면 “오늘 교회 오신 분들은 저를 따라 하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순간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라고 따라 하게 한 뒤에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것은 통상 내 혼이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내 혼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나의 ‘지, 정, 의’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 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거듭남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영, 곧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오늘 잠깐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내 영이 있습니다. 내 영이 육체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내 육체가 내 영을 담고 있습니다. 그 때 원 귀신이 같이 출생됩니다. 원 귀신이 우리 육체 안에 따로 거하는데 우리 육체 안에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 원 귀신이 같이 출생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모두 날 때부터 귀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내 영이 원 귀신에서 제재를 받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음란하게 되고 권위에 대해 순종하지 않게 되고 탐심을 갖게 되는 등 이런 모든 원 귀신의 영향을 늘 받으며 살게 됩니다. 늘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혼자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 할지라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원 귀신이 우리 안에서 계속 우리에게 죄를 전달시키기 때문에 내 영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할지라도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를 안 지으며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100% 지옥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을 자연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자연인이 성경말씀을 읽거나 예배를 참석하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에 어느 순간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제는 내 영이 있고 그리고 원 귀신도 있고 성령님이 계신 3중 인격체로 변화가 됩니다. 그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육체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의 본체이신 성령님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고통이 시작됩니다. 어떤 고통이냐 하면 이제까지는 원 귀신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어서, 음란과 거짓과 탐심과 미움과 온갖 악들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성령님이 내주 할 때부터 "음란하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거짓말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하고 우리 안에서 계명을 깨닫게 하심으로 내 영이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것은 '중생' 곧 씻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나 단순한 교리에 관한 말씀이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은 씻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주체할 수 없는 씻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중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중생을 설명 할 때에 '양심에 피 뿌림을 받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양심에 작용되어 양심이 살아나는 영적인 출생이 바로 중생입니다. 그 전까지는 내 영이 원 귀신의 영향을 받고 살아 양심이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내 양심이 깨끗하게 됩니다. 내 양심이 죄를 용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를 지어도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며 죄가 용납되는 설교는 가짜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 가짜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음으로 드디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가짜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죄에서의 해방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지적입니다. '너 이런 죄를 짓고 있어!'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너는 이런 죄를 짓고 있어!' 하고 양심이 발동합니다. 그 양심이 깨끗하게 됐기 때문에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때문에 힘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님의 통치, 내주하심을 통하여서 항상 제재가 따라옵니다. 죄를 지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석연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시는데 죄를 짓는 나를 가만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음란한 나를 가만히 지켜만 보시겠습니까? 통치라는 것은 왕의 통치를 말합니다. 나에게 왕이 되어서 나에 대하여 그 분의 주장을 펴시는 것 입니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고 옆에서 끊임없이 자극하십니다. 이것이 통치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나를 통치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그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통치하는데, 무엇을 통치하시느냐? 이제까지 지은 죄들에 대해서 간섭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어서 통치하시는데 그 통치의 본질은 다윗 왕처럼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알려 줍니다.


조선시대 때에 토마스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 왔죠. 그 때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그 당시 조선시대에는 화투를 많이 쳤는데 “여러분 화투치지 마십시오! 계집질하지 마십시오!" 옛날 사람들은 기생집에 많이 갔었죠. “여러분 술 마시지 마십시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막걸리를 많이 마셨는데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담배 피우지 마십시오!" 옛날에 무리 나라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여러분 우상에게 제사하지 마십시오!" 이 다섯 가지가 토마스 선교사가 국내에 복음을 들고 오면서 가지고 있는 규례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다섯가지 규례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에 신교인 우리나라 장로교가 깨끗했던 이유, 그리고 일제시대 때에 1%의 크리스천들이 빛을 발했던 이유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말씀대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이십니까? 과연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십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죄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사람만이 속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속죄의 이론을 증거 합니다. 구원의 이론을 증거 합니다. 그런 거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내가 속죄에 대한 이론을 몰라도 그냥 속죄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속죄 이론들이 맨 뒤에 나옵니다. 로마서부터 속죄의 이론들이 나오죠. 속죄 이론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속죄는 예수님이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통치를 받는 자기 백성들에게 속죄를 적용시키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확신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시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통치하신다면 자동적으로 다윗처럼 구원 받습니다. 다윗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너무 아름다워서 다윗처럼 성경에 묘사가 많이 된 인물은 없습니다. 여러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인물 탐구를 쭉~ 해 보십시오. 가장 많은 성령의 증거는 다윗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모든 삶들이 예수님에게서 통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은 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너 이렇게 살아야지, 사랑 해야지, 용서 해야지, 이렇게 해야지’ 하고 우리 안에서 자꾸 말씀하십니다. 그게 의입니다. 성령님은 첫 번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 이제 기도해야지, 너 주일 성수해야지, 너 부모님을 공경해야지, 너 이제 더 거룩해야지' 하고 의를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경고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너 계속 죄를 지으면 내가 너를 버릴 거야', '너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징계할거야.' 이런 경고들이 심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반드시 경고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 지금처럼 지내면 지옥간다.' 이것이 성령님의 음성인줄 아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죄를 지적하시고 의를 말씀하시며 심판을 말씀 하십니다. 그 심판은 이 땅의 하나님의 심판 및 징계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 모든 징계, 심판, 지옥들은 다 성령님의 음성인줄 아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성령님은 참 좋으신 분이야. 사랑이 많으셔.' 라고 착각합니다. 때로는 성령님의 분노가 맹렬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히브리서를 보시면 압니다. 성령님의 분노는 맹렬하여서 광야(시나이 반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자기 백성 대부분을 지옥에 던지십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면 여러분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를 지적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거부하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에게 늘 말씀하십니다. 마치겠습니다!


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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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6절


5월 31, 2020


6. 그런즉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가 모두 14세대이며,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까지 14세대이며, 바벨론 이주부터 그리스도까지 14세대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절입니다. 이 14세대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은 다윗의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오셨는데 이 그리스도를 묘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인데, 메시아 통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윗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죠.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올거야! 나중에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그 누군가가 올거야! 나중에 어떤 아들이 태어나서 우리를 다스리는데, 우리는 꿈같은 삶을 살거야' 하고 구약 내내 기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윗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출생 하셨을 때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죠. 이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은 왕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메시아가 오면 우리를 잘 통치해 잘 먹고 잘 살거야! 우리는 행복할 거야!'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오면, 정치적으로 왕이 되어서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는 한 자리 할거야!' 그래서 다툼도 일어납니다. 자기들끼리 '자. 너는 오른편에 앉아 왼편에 앉아!'라고 자리다툼이 일어납니다.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한 그 이해와 사고가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다음에 모든 수난과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값을 치루시고 부활 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체로써 이 땅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10일 뒤에 승천하시고 10일 뒤에 오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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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1절


5월 27, 2020


1.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책입니다. 이 4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을 먼저 시작하게 된 이유는 마태가 주로 쓰고 싶어 하는 내용이 천국과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4복음서가 다 천국과 지옥이며 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런 내용들이지만 천국과 지옥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복음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복음이란 것 자체가 왕국으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국의 복음, 왕국의 복음이며 천국과 지옥이 논해지지 않는 복음은 사상누각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이 4복음서 중에서 제일 앞에 온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마태복음이 제일 앞에 와야 되는 이유가 1절에 정확하게 나옵니다. 오늘은 1절만 같이 강해를 나누려 합니다. 1절의 첫 단어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구약 창세기의 첫 번째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이 앞에 와야 되는 이유는 창세기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첫 번째 책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마태복음에서 첫 시작이 '아브라함'이라고 안 나오고 요한복음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런 식으로 썼다면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연결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을 씀으로써 '내가 지금 기술하는 이 마태복음은 구약의 연결선 상에 있는 책입니다'라는 의도로 쓴 겁니다. 마태는 '구약은 끝난 것이 아니며,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구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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