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1장 ( 거듭남, 성령세례, 마귀시험)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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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러나 이 온 일이 일어난 것은, 선지자를 통해, "오호, 처녀가 자궁 안에 가질 것이며 아들을 출산할 것인데, 그분의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고 번역되는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라고 주님에게서 선포된 것이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12절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11절 말씀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 그분이 자기 백성, 그분의 백성을 우리의 모든 죄들로부터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12절은 11절보다 앞에 넣을 수 없고 뒤에 넣어야 하는데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어디 있을까요? 에스겔서에 정확히 표현 됩니다. 에스겔서는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끌려가는데 영적으로 구원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자도 구원을 상실합니다. 무엇 때문에 상실할까요?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증오하시고 분노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70년 생활은 영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이탈된 것을 말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버리실까? 버리십니다. 떠나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교리 때문입니다. 제가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그런 개념을 빼버린 것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이 성경에서 지옥을 빼버린 것처럼, 또 카톨릭이 십계명 중 2계명 우상계명을 빼버린 것처럼 교리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우릴 버린다는 개념을 빼버렸기 때문에 제가 교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리는 중요하죠. 하지만 위험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골짜기에 마른 뼈들에 소생을 약속하고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올라와서 헤엄치는 회복을 통하여서 드디어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의 땅의 분배가 나옵니다. 땅의 분배는 천국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에서도 땅의 분배가 나오죠. 이 땅의 분배는 천국을 말합니다. 에스겔서도 천국이 나오죠. 요한계시록도 천국이 나옵니다.
그 천국을 등상시키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며 히브리말로 '임마누엘'입니다. '임'은 우리입니다. '마누'는 함께 입니다. '엘'은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이 원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히브리말 입니다. 영어는 'God with us' 입니다. 그리고 그 도성을 다 묘사한 다음에 맨 끝에 이것을 '하나님의 도성이라 하였더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여호와 삼마라 하였더라' 여호와 삼마의 복이 임하는데 삼마의 복은 바로 천국의 복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설명할 때 대부분 임마누엘을 그냥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라고 말합니다. 찬양으로도 '하나님 우리 함께 하시니' 하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못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여러분의 문제를 토로하는데 바쁠 것입니다. "나는 돈이 없어요. 내 주위에 사람이 없어요. 어려운 재난을 만났어요." 하고 토로할 것입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는 질병에서 낫는 것을 중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병이 있어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조금 더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천국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 정도가 아니라 죽은 뒤에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에스겔에서 표현하는 바벨론의 포로생활에 맨 끝에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여호와 삼마'라고 쓴 것은 바로 너희가 지금 이 땅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진짜로 얻어야 할 것은 바로 천국이란 것입니다. 이 땅은 무엇입니까? 바벨론입니다. 마귀가 왕 노릇 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얻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왜 예수라 하느냐? 그들의 죄에서 구원이 아니라 원어로는 그들의 죄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죄가 복수로 쓰여진 것은 자범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죄를 이해할 때 단수로 이해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에 단수 표현이 있죠. 그 단수는 '죄성'입니다. '죄의 힘'입니다. 단수는 근본적인 죄 자체를 의미하고 실제 구원을 표현할 때는 다 '죄들'이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서는 죄들이라고 표현된 이유는 우리가 건짐 받은 죄는 단순한 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이해할 때 '믿으면 죄사함 받아.'가 아닙니다. 단수 죄가 아니라 전부 다 복수 죄들입니다. 믿으면 죄들에서 사함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짓고 있는 그 실제적인 죄, 그 매일의 죄가 하나님과 끊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기쁨도 상실해 버리고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그 평안도 상실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서 올 수 있는 영적인 계시와 교류가 상실돼 버립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기복 신앙을 싫어합니다. 이유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신앙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 대신 무언가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듯이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끊어놓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알고있는 '4영리'는 거짓말 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버리십시오! 진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만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우리는 죄들을 끊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죄, 생각의 죄, 듣는 죄, 눈의 죄를 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요셉과 함께 하셨을까요? 단지 감옥에서 고난 받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한 이유는 요셉이 죄를 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죠. 그리고 꿈을 많이 꾸었죠. 신령한 꿈도 꾸었죠. 하지만 그 단계가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구원이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여러분의 구원을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죄를 끊는 작업입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해 죄가 인식되기에 죄를 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끊어질 때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끊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이나 찬송생활이나 말씀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죄를 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를 끊어버린 그 결과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죄를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축복은 죄가 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반대로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신다'는 사실을 아시고 모든 죄에서 떠나 완전한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12절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11절 말씀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 그분이 자기 백성, 그분의 백성을 우리의 모든 죄들로부터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12절은 11절보다 앞에 넣을 수 없고 뒤에 넣어야 하는데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어디 있을까요? 에스겔서에 정확히 표현 됩니다. 에스겔서는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끌려가는데 영적으로 구원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자도 구원을 상실합니다. 무엇 때문에 상실할까요?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증오하시고 분노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70년 생활은 영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이탈된 것을 말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버리실까? 버리십니다. 떠나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교리 때문입니다. 제가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그런 개념을 빼버린 것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이 성경에서 지옥을 빼버린 것처럼, 또 카톨릭이 십계명 중 2계명 우상계명을 빼버린 것처럼 교리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우릴 버린다는 개념을 빼버렸기 때문에 제가 교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리는 중요하죠. 하지만 위험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골짜기에 마른 뼈들에 소생을 약속하고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올라와서 헤엄치는 회복을 통하여서 드디어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의 땅의 분배가 나옵니다. 땅의 분배는 천국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에서도 땅의 분배가 나오죠. 이 땅의 분배는 천국을 말합니다. 에스겔서도 천국이 나오죠. 요한계시록도 천국이 나옵니다.
그 천국을 등상시키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며 히브리말로 '임마누엘'입니다. '임'은 우리입니다. '마누'는 함께 입니다. '엘'은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이 원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히브리말 입니다. 영어는 'God with us' 입니다. 그리고 그 도성을 다 묘사한 다음에 맨 끝에 이것을 '하나님의 도성이라 하였더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여호와 삼마라 하였더라' 여호와 삼마의 복이 임하는데 삼마의 복은 바로 천국의 복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설명할 때 대부분 임마누엘을 그냥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라고 말합니다. 찬양으로도 '하나님 우리 함께 하시니' 하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못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여러분의 문제를 토로하는데 바쁠 것입니다. "나는 돈이 없어요. 내 주위에 사람이 없어요. 어려운 재난을 만났어요." 하고 토로할 것입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는 질병에서 낫는 것을 중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병이 있어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조금 더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천국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 정도가 아니라 죽은 뒤에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에스겔에서 표현하는 바벨론의 포로생활에 맨 끝에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여호와 삼마'라고 쓴 것은 바로 너희가 지금 이 땅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진짜로 얻어야 할 것은 바로 천국이란 것입니다. 이 땅은 무엇입니까? 바벨론입니다. 마귀가 왕 노릇 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얻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왜 예수라 하느냐? 그들의 죄에서 구원이 아니라 원어로는 그들의 죄들,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죄가 복수로 쓰여진 것은 자범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죄를 이해할 때 단수로 이해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에 단수 표현이 있죠. 그 단수는 '죄성'입니다. '죄의 힘'입니다. 단수는 근본적인 죄 자체를 의미하고 실제 구원을 표현할 때는 다 '죄들'이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서는 죄들이라고 표현된 이유는 우리가 건짐 받은 죄는 단순한 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이해할 때 '믿으면 죄사함 받아.'가 아닙니다. 단수 죄가 아니라 전부 다 복수 죄들입니다. 믿으면 죄들에서 사함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짓고 있는 그 실제적인 죄, 그 매일의 죄가 하나님과 끊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기쁨도 상실해 버리고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그 평안도 상실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서 올 수 있는 영적인 계시와 교류가 상실돼 버립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기복 신앙을 싫어합니다. 이유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신앙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 대신 무언가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듯이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끊어놓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알고있는 '4영리'는 거짓말 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버리십시오! 진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만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우리는 죄들을 끊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죄, 생각의 죄, 듣는 죄, 눈의 죄를 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요셉과 함께 하셨을까요? 단지 감옥에서 고난 받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한 이유는 요셉이 죄를 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어릴 때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죠. 그리고 꿈을 많이 꾸었죠. 신령한 꿈도 꾸었죠. 하지만 그 단계가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구원이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여러분의 구원을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죄를 끊는 작업입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해 죄가 인식되기에 죄를 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끊어질 때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끊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이나 찬송생활이나 말씀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죄를 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를 끊어버린 그 결과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죄를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축복은 죄가 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반대로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신다'는 사실을 아시고 모든 죄에서 떠나 완전한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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