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마태복음 2장 109절 강해-산상수훈-염려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며, 염려는 성결의 회개를 하면 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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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이러므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영혼을 염려하지 말라. ‘무엇을 입을까?’ 너희 몸도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109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는 ‘하나님과 돈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에 이어지는 ‘이러므로’죠‘. 너희에게 말하는데’ 무엇입니까? 
강조사항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센 것! ‘진실로’ 약간 센 것! ‘너희에게 말하는데’ 강조사항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먹는 것, ‘빵’ ‘고기’ ‘음식’이지요.



마시는 것, ‘물’이지요.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이기에 물이 귀합니다. 우리는 ‘뭐 마실까?’가 없지요. 우리 나라는 계곡마다 물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물이 없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원래 물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2백만명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산림이 굉장히 울창한 나라였습니다. 얼마나 울창했으면 포도송이 하나를 둘이 메고 갈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다윗때도 마찬가지로 풍요의 땅입니다. 사자와 곰이 싸웁니다. 

여러분! 울창해야 사자와 곰이 있습니다. 다윗이 양을 지키면서 사자와 곰을 막아냈고 다윗 때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상당히 울창했습니다. 점점 이스라엘이 사막화가 진행 되고, 예수님 당시에는 물이 없는 황량한 땅이 된 것입니다.



BC1500년 전이 모세 때인데 그 모세 때의 울창함이 1500년이 지나면서 아주 황폐하게 된 것립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모든 땅들은 사람의 영이 지배합니다. 지금 중동도 황폐하고 북아프리카도 황폐하지요. 그리고 중국도 황폐해 갑니다. 또 중미도 거의 사막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사막화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사막화는 우리 영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당장에 우리 남한과 북한을 보더라도 북한은 황량하지 않습니까? 물론 북한이 나무를 베어서 황폐해졌고 그 결과 북한은 비가 덜 옵니다. 남한은 비가 자주 옵니다. 같은 대한민국 가운데서도 비가 적게 오고 많이 옵니다. 사막화는 비가 적게 오는 현상입니다. 강수량이 부족한 것입니다. 수증기가 올라가야 비가 오는데 사막이 되는 이유는 올라갈 수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황사현상은 중국 서쪽에 사막에서 오는 먼지들입니다. 봄에 북경만 가더라도 마스크와 안경을 써도 버틸 수 없을 만큼 심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사막화 현상, 이것은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타락해서 오는 현상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먹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실까?’ 뭡니까? ‘엥겔지수’입니다. 엥겔지수는 총 지출 대비 식료품비입니다. 내가 100만원을 법니다. 그러면 이제 50만원 먹고 씁니다. 그렇게 되면 후진국입니다. 50%이상 엄청난 후진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은 변치 않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비용은 일정합니다. 내가 만약에 100만원 버는데 10만원 먹는데 씁니다. 그러면 선진국입니다. ‘엥겔지수’로서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영혼을’ 영은 영혼과 다른데 영은 그냥 ‘생명’이라고 번역해도 되고, 영혼은 ‘목숨’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먹지 못하면 죽게 되니까, 먹고 마시는 기본적인 필수요건의 ‘필요’입니다. ‘생존요건의 필요’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생존의 필요에 대해서 너희 영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입을까’ 예수님께서는 ‘먹을까 마실까’에 연결시키지 않고, 따로 떼어서 말씀하십니다. 왜? 일까요? 입지 않아도 죽지는 않습니다. ‘너희 몸도’ 이것은 문화적인 곧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냄새 맡는 것, 감각으로 느끼는 것으로, 옷은 따뜻하게 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생존목적보다는 남에게 보여지는 목적입니다. 옷은 문화적인 필요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옷은 1년 노동자가 벌어야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굉장히 비쌌습니다. 과거에 ‘옷값’은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언제부터 값이 떨어졌는가 하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입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때, 먼저 시작된 것이 ‘직조 기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옷이 비싸기 때문에 옷을 저렴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대량 생산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은 값이 얼마 들어가지 않았는데, 옷은 비싼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사 프란시스 같은 경우도 가지고 있던 옷을 가난한 자에게 줍니다. 그 옷 값은 어마어마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최하 3백만원은 됩니다. 그리고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자색 옷을 입었는데’ 라고 나옵니다. 이런 옷은 지금 시가로 치면 사실 ‘1천만원에서 1억 정도’됩니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더 비싸게 말합니다만 제 나름대로 값을 떨어뜨려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지금은 뭐가 부의 상징입니까? 지금은 집과 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부의 상징은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과거 왕족 시대에는 옷이 부이 상징이었지요. 귀족의 옷이 있고, 평민의 옷이 있고, 계급이 옷으로 나뉘었습니다. 옷이 신분에 대한 표현이었고, 계급에 대한 표현이었고, 또한 ‘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은 문화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생존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필요 ‘자동차’, ‘집’, ‘옷’ 또 ‘문화적인 전자제품’ 모두를 말합니다.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말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뿐 아닌 모든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를 끊어야 합니다. 염려는 언제 출발했을까요? 염려의 출발은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날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은 염려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돈 있어도 염려하고 잘 되어도 염려합니다. 불안합니다. 그래서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탐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염려와 탐심은 서로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탐심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염려의 분량만큼 탐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내재적으로 탐심과 염려는 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죄입니다. 그런데 지옥 갈 죄는 아닙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염려가 강하면 잘못하면 지옥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 영이 있고, 귀신의 영이 있습니다. 이 귀신의 영은 미움과, 음란과, 교만을 주는 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옥에 들어가는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 미워하십니까? 지옥 갑니다. 여러분 음란합니까? 지옥 갑니다. 교만 합니까? 지옥 갑니다. 이것은 귀신의 의한 영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은, 염려를 주며 탐심을 줍니다. 그리고 외로움을 줍니다. 인간의 영의 정서는 염려와 탐심과 외로움입니다. 여러분 외롭습니까? 내 영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은 사랑과 기쁨과 평안의 영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는? 염려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이것은 미움, 살인의 영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폭행했습니다. 음란합니다. 귀신의 영입니다. 이것은 지옥의 아주 큰 사유가 됩니다.



그런데 내 영이 나를 주관하면 염려하는 그 자체가 지옥의 사유가 되지 않지만 염려와 탐심이 나를 가로막으면 성령님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염려’와 ‘가버릴 향락’과 ‘물질에 대한 재리의 유혹’에 막히면, 성령님의 열매를 맺지 못해서 결국에 지옥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염려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CCM‘은 대부분 염려로 만들어진 노래들입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왜 부르는 줄 아십니까? 염려 때문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염려 때문입니다. 염려 없으면 그런 노래 부르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장하시면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기쁨과 평안과 사랑입니다. 내 영이 나를 주관하면 염려와 탐심, 외로움이 나를 주관합니다.



여러분 외롭습니까? 많은 가요가 외로움의 산물입니다. 외로울 때, 외로움에 대해 푸념하는 노래가 ’가요‘인 것입니다. ccm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ccm은 찬양이 아닙니다. 우리 정서를 달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듭나지 못한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이 염려, 탐심, 외로움이라는 정서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정서는 모든 자연인의 정서입니다. 그래서 ccm을 들으면 마음이 달래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 들을 때, 조심 하십시오!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탐심입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에게서는 ’만족‘이 나옵니다. 성령님이 나를 주관하면 만족합니다.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그런데 자연인의 모습은 탐심 때문에 자꾸 포장해서 자꾸 부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자꾸 꿈을 꾸라고 합니다. 탐심입니다. 그래서 자꾸 부흥시키려고 합니다.



염려를 끊는 방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러분! 염려의 반대는 믿음입니다. !”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애써 보십시오. 되나 안 되나? 못 끊습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를 끊는 방법으로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염려‘를 못 끊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외로움‘을 못 끊습니다. 솔직히 누가 염려하고 싶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염려 끊는 법‘ 아주 간단합니다. 아주 간단한 것인데 성결의 회개를 하면 끊어집니다. 회개가 터지면 그 많은 염려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분명히 염려가 너무 많아서 염려에 짓눌렸었는데, 회개가 터지면서 염려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터지면 내 안에 성령님이 활성화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여러분! 염려를 끊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 여러분! 해 보십시오! ” 여러분! 앞길이 캄캄하고 사방이 어둡고 두렵습니까? 염려가 됩니까? 이럴 때 여러분께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하나니 앞에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사함 받을 때, 괜히 평안해 집니다. 괜히 마음에 소망이 생깁니다. 괜히 마음속에 희망적이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 거짓된 믿음에 속지 마십시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염려가 오고 외롭고 탐심이 강하게 옵니까? 회개 하십시오! 그러면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활성화 되고 내 영이 위축이 되어서 염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염려를 못 이깁니다. 그래서 자살 하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대부분 자연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시면 자살로 끌고 가는 귀신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염려하는 상태에 귀신이 붙어서 자살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염려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염려한다는 것은 충만하지 않다는 반증이며, 심지어 염려를 못 끊는다면 자연인입니다. 거듭난 경험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염려를 이길 수 있는 성령님이 계시고 그 성령님께서 염려를 끊을 수 있는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 끊기를 한 번 해 보십시오! 회개를 반복해 보십시오! 염려를 끊을 수 있습니다. 염려가 아주 멀리 있는 남의 얘기 같아 집니다. 사람이 염려가 되는 것은 형편 때문이 아니라 태고적부터 타고난 인간의 영의 현상입니다. 회개로 염려를 끊어 보십시오! 그러면 평안함이 주장합니다! 마치겠습니다!
(peace405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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